빗방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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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꽃
  • 장병훈 편집위원
  • 승인 2009.05.18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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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방울 꽃

                               문신
 
 남쪽에서 길을 놓치고 민박집에 들다 

늦게까지 불 켜두고 축척지도의 들길을 더듬다 

쩌렁쩌렁 난데없는 소리에 억장 무너지다 


  
 알고 보니 민박집 양철 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아니, 야음을 틈타 양철 지붕에 꽃잎 피어나는 소리 

꽃잎 자리에 얹힌 허공이 앗 뜨거라, 후닥닥 비켜 앉는 소리 

깊은 밤 먼 골짜기에 잠든 귀 어두운 뿌리도 들으라고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 


  
 민박집 방에 걸린 농사달력은 곡우(穀雨) 

이 빗방울 스미는 자리마다 꽃잎 꽃잎 

묻어둔 뿌리를 깨우는 소리 쩌렁쩌렁 

양철 지붕에 꽃잎 피어나는 소리 
 
내 안까지 적셔내는 소리 내 안에서 꽃잎 피어나는 소리 


  
 민박집 나서며 바라본 처마 끝 낙수 자리 

꽃잎처럼 둥글게 피어서 

꽃잎들이 묻어둔 뿌리까지 스민 흔적

비오는 날엔, 그대 가슴을 양철지붕으로 바꾸어 버릴 것!

히야, 좋다. 빗방울이 꽃이구나. 가문 그대 가슴의 텃밭에 내리는 빗방울은 분명 꽃 맞다.


“민박집 양철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만큼 짜릿한 서정이 또 어디 있을까? 이런 매력적인 빗방울 소리를 듣는데 아무런 준비물이 필요 없다는 것 또한 매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난해도 좋다. 아니 가난이 오히려 재산이 될 때가 있다는 것은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저 두 팔 벌리고 벌러덩 누워서 눈만 감으면 된다. 온갖 상상의 뿌리들이 깨어나서 그대 서정의 텃밭에 빗방울들이 간지럽게 뛰어다닐 것이다.

“내 안까지 적셔내는 소리 / 내 안에서 꽃잎 피어나는 소리”를 들어보자. 고요한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그 파문波紋이 꽃잎 피어나는 소리라니! 빗방울들이 후두두둑 마음대로 뛰놀다가 꽃잎으로 만개하는 소리, 원없이 들어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날엔 아무래도 내 가슴을 양철지붕으로 바꾸어 버려야겠다.

 

시인 장병훈은 월간 시전문지 <심상>을 통하여 문단에 나왔으며, 동리목월문학관의 ‘詩作나무’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화룡동 산 7번지의 선화여고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문학동아리 ‘좁은문’지기를 하고 있다.

* 영천뉴스24 블로그인 <별빛촌닷컴>(http://www.01000.in)을 방문하면 장병훈의 <시와 연애를 하자> 전편을 볼 수 있습니다.



영천뉴스24 장병훈 편집위원 siij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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