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득사의(見得思義) 가르침 얻은 고도 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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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득사의(見得思義) 가르침 얻은 고도 강릉’
  • 이원석 기자
  • 승인 2009.05.15 1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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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헌, 선교장, 경포대… 영천문화원 문화탐방

영천문화원(원장 성영관)에서는 14일 우수한 문화 사적지와 천혜의 관광자원이 풍부한 관광도시로서 고도의 멋과 전통이 살아있는 예향의 도시 강릉을 찾았다.

‘솔향 강릉’을 브랜드로 사용하고 있는 강원도 백두대간의 동쪽 영동지역 중앙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동해바다가 있고 서쪽에는 평창군과 정선군이, 남쪽으로는 동해시, 북쪽에는 양양군이 인접해 있다.

▲ 강릉향교 대성전

전체 면적은 1,040㎢(서울시 면적의 1.72배)이며 총인구는 218,399명(86,399세대)으로 행정구역은 1읍 7면 13동 323통 146리 2,637반으로 구성돼 있다.

5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5시간여 걸려 도착한 200여명의 영천문화원 회원과 유림들은 점심식사를 한 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강릉단오제 조병우 해설사와 강원금빛평생교육봉사단 박원균 문화해설사의 안내로 먼저 강릉향교(시도유형문화재 제99호)에 도착했다.

▲ 강릉향교 진학문

나주향교, 장수향교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향교의 하나라는 강릉향교(江陵鄕校)가 강릉시 교동의 명륜고등학교 뒤 울창한 숲 아래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학교인 향교와 오늘의 학교가 함께 있어서 전통을 사랑하는 문화의 고장임을 느끼게 한다.

▲ 강릉향교 명륜당

성종3년(1472)에 강릉출신의 여러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했는데 10년이 지난 후 이들이 주동이 돼 3년여에 걸쳐서 70여 칸의 건물을 완성했고 다행히 임진왜란 때 큰 피해를 입지 않아서 잘 보존됐다고 한다.

경사면의 맨 위, 뒤편에 문묘인 대성전과 동무, 서무가 한 영역을 이뤄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선현(先賢)들의 제사를 지내는 후묘(後廟)가 되고 명륜당(明倫堂)과 동재, 서재가 그 앞으로 또 다른 한 영역을 이뤄 학생들이 공부하고 기거하는 전학(前學)이 되고 있다.

▲ 율곡 이이 동상

이런 건물배치를 전학후묘(前學後廟)라 하는데 성균관과 지방 향교, 서원들이 대개 이와 같은 구조와 배치를 따르고 있다.

▲ 오죽헌

문묘의 중심을 이루는 대성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柱心包系), 홑처마, 맞배지붕이고, 전학의 중심인 명륜당은 교육기능에 알맞게 7칸이나 되게 길고 넓게 지었으나 화려한 단청이나 치장을 피하고 검소와 검약을 쫓는 유가(儒家)의 기품과 겸양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 오죽헌 문성사

경사진 지형의 높낮이를 이용해 축대와 계단을 설치하고 영역별로 각각 아늑하고 친근한 공간을 형성했다.

▲ 신사임당 동상

명륜당 앞에는 여느 향교나 서원에서 처람 행단(杏壇)이라고 일컫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는데 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데서 유래하고 있다.

강릉향교에서 성현들을 배알한 후 ‘겨레의 어머니ㆍ겨레의 스승이 태어난 성지’ 오죽헌(보물 제165호)을 방문했다.

율곡선생의 ‘見得思義(견득사의 : 이득을 보거든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라) 가르침을 간직한 오죽헌은 1450년 무렵 지어진 건물로 1505년 형조참판을 지낸 최응현이 둘째딸의 사위인 이사온에게 물려줬다.

▲ 오은고택

이사온은 외동딸을 서울의 신명화와 혼인시켜 딸만 다섯을 뒀는데 그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는 강릉의 친정어머니 최씨가 병이 나자 간호를 위해 강릉에 머물러 있을 때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을 낳았다.

▲ 열화당

또한 사임당도 서울의 이원수와 결혼했으나 홀로 계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강릉에서 지내다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비록 시집은 갔어도 친정부모를 보살피려는 ‘효’ 때문에 신사임당과 율곡이 오죽헌에서 탄생하게된 것이다.

사임당의 어머니가 넷째 딸의 아들 권처균에게 현재의 오죽헌을 물려줬는데 ‘오죽헌’은 집주위에 까마귀처럼 검은 대나무가 많아 권처균이 자신의 호를 오죽헌이라 지은 데서 비롯됐다.

경내에는 몽룡실, 문성사, 어제각, 율곡기념관, 바깥채, 안채 및 시립박물관이 있다.

일정에 쫓겨 조금은 급하게 찾은 곳이 1967년 4월 18일 중요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선교장이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살림집인 선교장은 전주사람인 이내번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지은 집으로 ‘선교장(船橋莊)’이라는 이름도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붙였다고 한다. 안채ㆍ사랑채ㆍ행랑채ㆍ별당ㆍ정자 등 민가로서는 거의 모자람이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 선교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강원금빛평생교육봉사단 박원균 문화관광해설사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들 중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열화당은 사랑채로서 순조 15년(18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안채와 열화당 사이에는 서재 겸 서고로 사용되던 서별당이 있었다. 대문 밖 바깥마당의 남쪽으로 위치한 넓은 인공연못에 서 있는 활래정은 열화당을 세운 다음해에 지었다. 돌기둥이 받치고 있는 마루가 연못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누각형식의 ㄱ자형 건물이다.

▲ 널뛰기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또한 소장하고 있는 여러 살림살이들은 옛날 강릉지방 사람들의 생활관습을 알아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강릉문화탐방의 마지막 코스는 관동팔경의 하나인 경포대였다. 경포대(鏡浦臺)는 강원도유형문화재 제6호로, 관동팔경의 하나로 강원도 강릉시에서 동북쪽으로 7km 지점에 있으며, 언덕 위의 누대(樓臺)이다.

고려 27대 충숙왕 13년(1326년)에 박숙(朴淑)이 창건하고, 조선 제11대 중종 3년(1508년)에 한급(韓汲)이 옮겨 세웠다. 경포호수와 솔밭, 동해의 청파에 떠도는 백조, 추석 달맞이 등이 매우 아름답다.

▲ 평양과 경포대 두곳에만 걸려 있다는 '제일강산' 현판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갈 길이 멀어 세계최대 규모의 오디오 박물관인 참소리박물관 관람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강릉단오제 조병우 해설사가 경포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날 문화탐방에 동행한 장영준(44)씨는 “영남과 기호지방의 문화를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특히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선교장의 아름다움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 경포호

성영관 영천문화원장은 “문화의 소중함이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는 요즘, 영천문화원 가족들의 문화마인드를 높이기 위해 기회를 마련했다”며 “앞으로도 시민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영천의 문화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영천뉴스24 이원석 기자 ycnews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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