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미소 보며 조상숨결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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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미소 보며 조상숨결 느꼈어요”
  • 이원석 기자
  • 승인 2009.05.11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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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대학 총동문회 충남 태안ㆍ서산ㆍ예산 답사

국립경주박물관대학 총동문회(회장 이광오)에서는 이근직 문화재청 전문위원의 지도로 10일 충남 태안ㆍ서산ㆍ예산일대로 2009년 정기답사를 떠났다.

▲ 태안마애삼존불

190여명의 동문들이 관광버스 네 대에 나눠 타고 다섯 시간여 만에 도착한 태안마애삼존불은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에 선행하는 조형양식을 지닌 백제 최고(最古)의 마애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앙에 여래상을 두고 좌우에 보살상을 배치한 일반 삼존불상과 달리 보살상을 가운데 두고 여래상을 좌우에 배치한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마애삼존불(국보 제307호)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북제양식 불상과의 영향 관계 파악에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 태을동천과 일소계

입구에 백조를 닮았다고 하는 백조암과 태을암 위쪽에 태을동천(太乙同天)과 일소계(一笑溪)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인상적이었다.

▲ 태을암

점심식사를 하고 난후 일정이 너무 빠듯해 예산사면석불을 제외하고 해미읍성은 버스 안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태을암 대웅전

두 번째로 들른 곳은 서산시 운산면에 자리 잡은 개심사(전통사찰 제38호)였다. 충남4대 사찰중의 하나로 ‘마음을 여는 절’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절은 백제 의자왕 14년(654)에 혜감국사가 창건해 개원사(開元寺)라 했다가 고려 충정왕 2년(1350)에 처능대사에 의해 중건되면서부터 개심사로 불려졌다고 한다.

▲ 백조암

중심당우인 대웅보전과 요사로 쓰이는 심검당, 안양루 등 당우 외에도 명부전을 비롯한 아미타삼존불, 관경병상도, 칠성탱와, 제석, 천룡도, 오층석탑, 청동은입사향완, 20가지 목판경전 등 많은 문화재급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 개심사 대웅보전

개심사에서 나와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서산마애삼존불로 이동했다.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돼 있다.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 범종

연꽃잎을 새긴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했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해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 안양루

머리에 관(冠)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해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 해탈문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 서산마애삼존불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 보원사지

특히 이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 보원사지 당간지주

서산마애삼존불에서 도보로 10여분 떨어진 곳에 보원사지가 있다. 신라 말∼고려 초에 세워진 절로 추정되며 상왕산(象王山) 북쪽에 있던 절터로 이곳에 있던 절을 강당사(講堂寺)라고도 했다고 한다.

▲ 보원사지 부도탑

현재 건물은 없고 아주 넓은 절터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조(보물 제102호)ㆍ당간지주(보물 제103호)ㆍ5층석탑(보물 제104호)ㆍ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ㆍ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제106호) 등과 그 밖에 쇠로 만든 불상이 있다.

▲ 보원사지탑

이날의 마지막 답사지는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의 묘소였다. 규모는 약 5,590㎡로 풍수지리설을 믿은 흥선대원군이 한 풍수가에게 명당을 찾아줄 것을 부탁해 풍수가가 2대에 천자가 나올 자리라며 이곳을 지목했다고 전한다.

▲ 남연군묘

이곳에는 원래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있었고 무덤자리에는 탑이 서 있었는데, 1844년(헌종 10) 대원군은 명당자리를 찾아 옛 가야사를 불지르고 탑을 부순 후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썼다.

그리고 인근 골짜기에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짓고 개운사 주지인 도문(道文)을 초대 주지로 삼은 후에 남연군묘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직책을 내려 묘를 돌보게 했다.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는데,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어둑해질 무렵 산에서 내려온 경주박물관대학 동문들은 시간의 제약으로 예산 수덕사를 못간 아쉬움을 뒤로하고 경주로 향했다.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박물관 주차장에 도착할 정도로 힘든 강행군이었지만 오랜만에 함께 수학하던 동료들을 만난 기쁨은 피곤함을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영천향토사연구회원으로 30기를 수료한 이상억(47)씨는 “당일일정으로 소화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평소에 찾아보기 힘든 백제문화권을 답사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며 “200명 가까운 대규모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서 경주박물관대학 동문들의 힘이 느껴졌다”고 했다.

 

영천뉴스24 이원석 기자 ycnews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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