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22 병와 이형상의 성고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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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22 병와 이형상의 성고구곡
  • 이원석 기자
  • 승인 2024.01.29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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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년 전 절경을 찾아서’ 13년 만에 다시 찾아
병와 이형상 선생, 주자의 ‘무이구곡’ 도학 계승 구곡 경영

城皐九曲(성고구곡)

 

總論(총론)

千古幽盤屬地靈 천고의 유반(幽盤)이 지령(地靈)에 속하여

至今山色滿溪淸 지금까지 산 빛은 시내에 가득히 밝네

晦庵有咏陶山和 회암(晦庵)이 읊었었고 도산(陶山)이 화답했으니

我役城皐作棹聲 나 역시 성고(城皐)에서 뱃노래를 짓네

 

一曲 泛月屛(일곡 범월병)

一曲深潭泛月船 일곡이라 깊은 여울에서 월선(月船)을 띄우고

棹歌時復過前川 뱃노래 부르며 이따금 다시 앞 내를 지나네

無端一坐將軍閣 까닭없이 장군각(將軍閣)에 한번 앉아보니

朝暮空含萬井烟 아침 저녁에 일만의 집 연기만 머금고 있네

 

二曲 棲雲巖(이곡 서운암)

二曲奇巖自作峯 이곡이라 기이한 바위 자연히 봉우리를 이루었는데

棲雲深處謝塵容 서운암(棲雲巖) 깊은 곳에 속세를 사절하였네

禪心已厭承明直 선심(禪心)은 이미 승명려(承明廬)에 벼슬하길 싫어하니

此脚何緣到九重 이몸은 어떤 인연으로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들어갈까?

 

三曲 下水龜(삼곡 하수구)

三曲徐牽下瀨船 삼곡이라 하뢰선(下瀨船)을 천천히 당겨 놓고

龜巖爲席酒爲年 구암(龜岩)을 자리 삼고 술로 해를 보내네

林泉自足烟霞趣 산과 물의 자연히 연하(烟霞)의 취미 만족하니

何事公門謾乞憐 무엇 때문에 관문(官門)에서 부질없이 동정을 구하랴

 

四曲 晩洗頂(사곡 만세정)

四曲層層聳斗巖 사곡이라 층층히 큰 바위 솟아있는데

一株癯木翠毿毿 한 그루 깡마른 나무 푸르게 늘어져 있네.

明沙浩渺灘聲轉 밝은 모래 호묘(浩渺)하고 여울 물소리 굴러가니

歧處吾稱晩洗潭 갈라져 가는 그 곳을 만세담(晩洗潭)이라 일컫도다

 

五曲 惹烟層(오곡 야연층)

五曲灣洄洞復深 오곡이라 물 굽이 돌아오고 골짜기 다시 깊은데

是丘人曰惹烟林 이 언덕을 사람들은 야연림(惹烟林)이라 부르네

君看畢竟朝宗海 그대는 필경에 모든 물 바다로 모임을 보았는가

然後方知萬里心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만리의 마음 알게 되리

 

六曲 寂波禪(육곡 적파선)

六曲灘從九折灣 육곡이라 여울물 아홉 번 돌고 돌아 흘러서

更邀晴月夜臨關 밝은 달 맞이하려 밤이면 관문(關門)에 이르네

青山不語波光寂 푸른 산은 말이 없고 물결 빛은 고요하나

靜處非閒動處閒 고요한 곳이 한가함이 아니라 움직이는 곳이 더 한가하네

 

七曲 鼎扶莊(칠곡 정부장)

七曲竿垂第七灘 칠곡이라 낚시대를 제칠의 여울에 드리우니

鼎扶風致好誰看 정부장(鼎扶莊)의 좋은 풍치(風致) 그 누가 볼까?

羊裘一解苔磯上 양(羊)의 갗 옷 이끼 낀 낚시터에 벗어 놓으니

潭影如今帶月寒 못 그림자 이제에 달빛 받아 차가웁네

 

八曲 沙搏峽(팔곡 사박협)

八曲淸光面面開 팔곡이라 여기 저기 어디에나 밝은 빛 열렸고

亂峯如揖水沿洄 크고 작은 봉우리 읍(揖)을 하듯 물을 따라 돌아오네

臨流默識推遷義 물가에 다달아서 추천(推遷)하는 의리를 곰곰이 살펴보니

不遇沙搏定不來 사박협(沙搏峽) 못만나 물이 또한 오지 않네

 

九曲 淸通社(구곡 청통사)

九曲烟塵地勢然 구곡이라 좋은 경치는 땅의 형세가 원래 그래서인가?

後川形勝勝前川 뒷 냇물의 형승(形勝)이 앞 냇물의 형세보다 더 낫네

淸通驛裡爲爲事 청통역(淸通驛)서 하고 하는 일이란

半是人間馬上天 반은 인간에서이고 반은 마상(馬上)에서일세

(1702년 숙종28 壬午 병와가 지었고 密城 孫貴睦이 헌액)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으로부터 연원되어 조선 성리학자들이 퇴계 및 율곡의 도학(道學)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구곡관련 문화를 향유하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구곡문화. 구곡원림은 단순히 아홉 굽이의 자연공간이 아니라 성리문화 구현의 공간이었으며, 이를 통해 도학을 체득하고 표출해 전수하는 의미로까지 나아가 각처에서 향유되었다.

계곡의 물줄기를 따라 펼쳐지는 아홉 곳의 빼어난 경치를 ‘구곡(九曲)’이라고 한다.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주자가 푸젠성〔福建城〕 우이산〔武夷山〕 계곡에서 노래한 ‘무이구곡’에서 따온 말이다. 조선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도를 존숭하는 의미로 우리나라 산중 계곡에 110개가 넘는 구곡을 설정했으며 영천시에는 성고구곡과 횡계구곡 두 수가 남아있다.

조선조 성리학자들이 직접 경영했던 구곡원림으로 유명한 것은 정구의 무흘구곡, 이중경의 오대구곡, 송시열의 화양구곡, 김수증의 운곡구곡, 권상하의 황강구곡, 이형상의 성고구곡, 정만양의 횡계구곡, 권섭의 화지구곡, 채헌의 석문구곡, 홍양호의 우이동구곡, 오대익의 운암구곡, 이한응의 춘양구곡, 이도복의 이산구곡 등이 있다.

병와 이형상 선생이 1702년 영천성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 중 아홉 군데의 절경을 노래한 성고구곡(城皐九曲). 지난 2011년 세 번째 답사에 이어 기승을 부리던 한파가 풀린 1월 27일 영천역사박물관대학 회원들과 함께 13년 만에 다시 찾았다.

병와 이형상(李衡祥, 1653~1733). 자는 중옥이며 호를 병와 또는 순옹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시대의 문관으로서 유교의 이념철학을 실천한 목민관이었다. 청주, 동래, 양주, 경주, 제주 등 9개 큰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그는 1703년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후 그동안 지니고 있던 인습과 악습을 타파하고 도민의 풍속을 교화하고 생활개선을 주도한 인물이다. 제주도 전역에 걸쳐 사당 오백 채와 사원 오백 채를 폐하고 승려와 무당으로 인해서 시행되던 가지가지 폐단을 시정했다.

이형상은 제주목사를 그만둔 뒤 영천 호연정으로 들어가 학문의 길에 파묻혔다. 잠깐 영광군수를 하기도 하지만 이내 그만두고 더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조정에서 다시 관직에 돌아올 것을 종용했지만 모두 사퇴하고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는 영천에 칩거하면서 30년 동안 오로지 연구와 저술에 몰두했으며 1733년(영조 9년) 11월 30일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796년(정조 20년)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의 유품은 보물 제 652호 지정되어 있으며 안타깝게도 보물로 지정된 탐라순력도는 제주도에 이전되었다.

범월병(泛月屛), 서운암(棲雲巖), 하수구(下水龜), 만세정(晩洗頂), 야연층(惹烟層), 적파선(寂波禪), 정부장(鼎扶莊), 사박협(沙搏峽), 청통사(淸通社)….

호연정 일대의 금호강에 조성한 성고구곡은 자연환경의 변화와 하천 개발 등으로 인해 지형이 많이 바꾸어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차례 답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았다.

‘깊은 여울에서 월선을 띄우고’란 문장을 볼 때 출발지는 금호강 둔치 분수대 부근, 일곡 범월병(병풍바위)은 조양각 아래. 이곡 서운암은 창대서원 아래 바위, 삼곡 하수구는 호연정 아래 거북바위, 사곡 만세정은 영천성당 구사제관인 성사헌 아래, 오곡 야연층은 영서교 주변 바위로 비정했다.

또 육곡 적파선은 중앙선 철교 상행선 조금 위쪽, 칠곡 정부장은 육곡에서 50여m 아래쪽의 절벽이 끝나는 부분, 팔곡 사박협은 중앙선 철교 하행선 유정숲, 구곡 청통사는 물길을 돌아서 청통역이 있었던 성내동 구터마을로 유추했다.

답사가 진행되는 동안 “평생을 영천에 살았으면서도 지금까지 성고구곡에 대해서 전혀 몰랐으니 영천에 헛산 것 같다.”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올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는 선조들의 유적에 대한 관심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경북 북부지역의 지자체나 시민단체들이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구곡원림 체험행사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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