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계 박인로와 홍시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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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계 박인로와 홍시의 미학
  • 유명자
  • 승인 2023.04.05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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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계 박인로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 3대 시인 중 한 분인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 1561(명종)~1642) 선생이라는 말은 그를 기리는 후렴구처럼 내려오는 문구이다. 선생의 예술이 그만큼 잘 발굴되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이에 필자는 ‘문/무를 겸비한 완전 융합형 시인이 한국에 그 말고 또 있었던가. 셰익스피어에 비기는 한국 시가의 대가 노계 박인로 선생은….’으로 이렇게 ‘새로 고침’ 시작하고자 한다.

선생은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시조 67수와 한시문 110수는 물론이고 특히 「태평사」나 「노계가」로 대표되는 총 11편의 가사 작품으로 가사 문학의 정수를 보여준 문인이자 무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전쟁 중에도 붓을 놓지 않고 시작을 하였으니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융합형 천재의 범례를 보여준다.

노계 선생은 임란과 병란의 전쟁과 광해군 집정 등으로 매우 혼탁한 한 세대를 건너시면서 전쟁이 나면 충·효로 나아가 싸우고, 끝나면 또 돌아와 문필에 힘썼다. 이렇게 전인적 복합형 재능의 소유자이시나 그만큼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조금은 유감으로 여겨져 영천의 노계 문학관을 선택·방문하였다.

노계 문학관

노계 문학관과 도계서원 전경(영천시 홈페이지)

그를 기리는 도계서원은 문학관 뒤, 오른쪽 숲의 끝자락 시계 12:30 방향에 작은 기와가 보이는 곳이다.

박인로 생가

선생의 생가 사진처럼 박물관 전시물들은 한 눈에도 들인 정성이 드러나면서 또 특이하게도 서구의 인문학자들, 예로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갈릴레오나 혹은 스피노자와 토머스 홉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예상치 못한 동시대 세계 학자들과 비교할 수 있는 인물 자료들을 전시해 놓았다. 이는 비록 그들이 동시대 유명 학자들이라는 점 외에는 아직은 특히 큰 동일성은 보기 어렵다고 할지라도, 일단 눈에 확 띄는 좋은 전시 방법이었고 박인로에 관한 관심을 몇 배로 상승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셰익스피어는 노계보다 3살이 아래다. 그와 노계는 스승과 제자가 불분명하였으며 작품 정리를 하지 않은 것이 닮은 점이라고 한다. 문학관은 전체적으로 밝은 빛깔의 색상과 현장감 나는 그림으로 노계를 선명히 부각시키며, 별로 크지 않은 장소임에도 그의 활동을 꼼꼼히 돌아볼 수 있게 한다. 여러 곳에 그려진 멋진 얼굴이나 지도상 표기된 발자취 등은 첫 방문자도 이해하기에 아주 편리한 자료들이라서 즐거이 감상할 수 있다.

박인로의 멋

가사 문학의 대가 박인로 작품활동

그래도 처음에 볼 때는 좀 의아하기도 했다. 갓과 도포의 문인 박인로, 무인으로 차려입은 무장 박인로, 선비 박인로, 시인 박인로, 이런 박인로의 얼굴과 모습이 마치 유치원 관람객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과하다 싶을 만큼 문학관 여기저기 형형색색 그려져 있다. 필자는 문학관을 재차 방문하게 되자 서서히 의아함에서 아하!로 넘어오면서 거기 있는 전시 개념과 의도를 조금씩 더 잘 짐작할 수 있었다. 훈남으로 성장(盛粧)한 박인로의 반복 등장은 그가 멋을 아는 선비이자 무장임을 확연히 보여주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그렇구나. 그 희귀하게 고상한 멋을 외/내양으로 한껏 차려 전시해 놓고 즐기게 하고, 탐구하고 최대한 보여주며 또 깊이 존경하고픈 것이리라.

그런 멋은 그냥 옷을 잘 입었을 때 나는 보통의 시시한 멋이 아니라 백의민족 대한민국의 그 유명한 육체적·정신적 멋, 프랑스 사람들이 말하듯 일상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인생 자체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생의 미’(L'Art de Vie), 그 멋 말이다. 그러니 선비 연구가 필요하다면 그의 정신을 따라가 보면 되지 않을까. 그를 대표하는 말들, “가객,” “도학적 삶,” “자연의 삶을 노래한 구도자,” “동방을 빛낼 호걸,”(노계 인문학 84) “무골로 태어났으니 장수”(바람의 가객 44) “기골이 장대하고 성정이 곧아”(바람의 가객 26) 등등은 문무에 모두 동등한 자질을 지닌 그를 묘사하는 문구들이다.

위의 “무골로 태어났기에 왜놈의 피를 보면 장수”가 될 것이라는 말은 실지로 노계가 어릴 때 우연히 지나가는 스님이 그를 알아보고는 그의 아버지에게 건넨 말이다. 그 승려는 그와 대화를 마치고는 책까지 하나 슬쩍 떨어트려 놓아 이후 노계가 그 책을 읽어보도록 했는데 그것은 바로 태평한화골계전(太平閑話滑稽傳)으로, 이는 “성종 8년(1477), 문형을 지낸 서거정이 항간에 떠도는 우스개 이야기를 묶은 설화집이다.”(47) 그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타인의 눈을 끄는 특출한 외양과 곧은 성정의 소유자였다. 선비를 넘어 선인의 경지에 오른 ‘선-인’(仙-人)의 멋을 아는 시인으로 보인다.

이제 경제적 밑받침을 이룩한 한국에서 문화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면, 예를 들어, 노계의 「대승음」 독해에서 제시될 노동과 직업의 K-비전에 더해, 필자는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이러한 한국인 고유의, 생(生) 앞에서의 멋스러운 태도를 모델로 정리하여 프랑스의 ‘생의 미’ 등과 나란히 소개하는 일도 좋을 것이라고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대구경북인문학협동조합에서 매년 기획하고 있는 지역 인물과 장소 탐구를 중심으로 한 본 시리즈물 출판 계획은 새로운 한국 문화콘텐츠 생성에도 이바지하는 점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가능하다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K-콘텐츠 개발을 위해 이 기획을 전국화하거나 대학의 교양과정 학생들, 모든 청년이 경험하는 건 얼마나 가치가 있을까, 생각해본다. 외국 문학을 주로 전공한 나 자신이 이 시리즈에 참가하면서 깊이 느끼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세상없는 문화가 있어도 그걸 정리하여 세계융합 언어화 즉 그것을 언어로 재소유하지 못하는 국민은 앞으로 미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곳에 비슷한 문화로 중국식 도학적 태도도 있지만, 도학은 자연을 너무 거대하게 놓아 인간이 그 안에 묻혀버리는 느낌도 있다. 그에 비해 한국적 선-인의 아름다움은 인간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기에 노동도 선-인이 하면, 「대승음」에서 보듯이 그냥 괴로운 노동요가 아닌 새로운 어떤 것이 된다. 그는 자신의 개인 손바닥 밭을 갈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구를 넘어 우주 경영에 나선 위대한 경영자가 된다. 우뚝 선 한 인간으로서 서울로도 호령하고 우주와도 교감 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노계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K-패러다임 미래 노동과 직업의 비전이고 초 기술 시대 지금 필요한 노동이다. 모든 노동을 넘어 진정한 창조 작업으로 연결될 것이다.

이런 귀한 영감을 주는 그를 기념하는 행사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노계 백일장과 전국시낭송대회이다. 앞으로는 더 많은 청년들이 이곳을 찾아 한국과 자신의 나아갈 바를 영감 받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문학관은 월요일이 휴관이다. 이제 전시관의 사진과 연상의 힘의 도움으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고자 한다.

노계 연보

어린 시인

박인로가 약관 열세 살에 창작한 「대승음」이란 시는 조용히 읊어보면 정말 고고한 고요함과 그 가운데 한바탕 새소리의 절묘한 조화가 가슴에 와닿는다. 시는 꿈결에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로 시작한다. 잠자는 농부의 마음도 자연스럽게 그 리듬에 젖어 든다. 하지만 해야 할 밭갈이가 있기에 조금은 바쁜 마음이다.

「대승음」(戴勝吟)

자주 낮잠을 깨우는 뻐꾸기 소리

어찌 시골 사람 마음을 재촉하는가.

저 서울[낙양]의 화려한 처마에서 울어

밭 갈기를 권하는 새가 있음을 알려라.

그러나 농부는 스스로가 엄연히 자연과 자기 자신의 지배자임을 보여준다. 그는 이 세계에서 우뚝 서 명령 한다 - 새소리의 리듬은, 다가오되 재촉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이곳에서 울되 또한 저 부귀영화의 탐스러운 도시에서도 울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천하지대본 농사가 있음을, 인간이 그가 발 디디고 있는 이 땅을 잊어서는 안 됨을, 다시 말해 밭 갈기를 앞둔 시간의 새와 인간 소리가 있음을 알리라고 근엄하게 주문한다. 찰나를 베어낸 시인의 붓끝에 시간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동시에 그건 또깍또깍 떨어지는 물방울, 베르그송(H. Bergson)의 시간이다. 순간의 소리와 연속, 이미지, 리듬, 절제, 엄중, 주문 등이 자연에 우뚝 선 준비된 한 인간의 장엄함과 고고함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시인의 기개에 포착된 고귀한 노동의 신성함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이런 어떤 우주적 장대함을 느끼게 하는 자연을 노래한다는 것은 진정 드문 일이다.

그러고 보니 문득 어린 시절 글쓰기와 시작에 대한 필자의 기억이 새록새록 해진다. 소도시의 초등학교 선생님께서는 작은 학교신문을 발간하셨고 당시 2학년 혹은 3학년이었던 나의 시를 거기 올리셨다. 지속된 발간은 기억나지 않으니 신문은 시범으로 발간하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무슨 시를 지었는지는 주제만 생각나고 구체적인 시구도 지금은 거의 잊힌 셈이다. 아무튼, 창문과 커튼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아이의 눈에는 바람에 한껏 부푼 창문 커튼이 아기를 밴 엄마처럼 보인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더 단단히 불룩해지는 모양이며 또 윙윙하는 바람 소리는 그 배가 아파하는 소리 같다는 말로 잇고 있었다. 창문을 바라보며 그게 과연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대로 적었을 아이의 시를 보고 선생님은 피식 웃으시며 재미있다고 느끼셨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들에게는 아기의 출생 문제는 언제나 신비한 사건이니까 말이다. 당연히 그때는 전혀 의식할 수 없는 상태였기에 몰랐지만 나는 ‘아빠 딸’이었으리라.

정신분석학에서는 남자아이는 엄마를 두고 아빠와 경쟁 하려 들고 여아는 아버지를 두고 엄마와 사랑의 갈등에 빠지기 일쑤라고 하니까 말이다. 그런 중에 여아의 사랑은 엄마처럼 아이를 가지는 간접 소망으로 나타나고 남아의 사랑은 엄마와 사랑하는 소원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결혼 대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대개 엄마를 닮은 상대인 이유가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한다. 그 시구절은 제목이 「창」이었을 듯하다.

창문 바람이 불 때마다

배 불룩한 커튼은

아기를 (등등.)

배가 불러, 배가 불러

아프다고, 아프다고

잉잉잉 우네.

대략 이런 내용으로 노래했던 나의 시는 영락없이 아기를 가지고픈 여아의 무의식을 그린 시였을 터이다. 그리곤 학년이 지나면서 차츰 선생님 주도하에 나의 글쓰기 훈련이 시작되었다. 급기야는 매 방학을 글쓰기나, 다른 경시대회 준비 활동에 반납하는 습관이 돼버렸다.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의 <거리의 멜랑콜리와 미스터리> 그림 마냥 긴 그림자를 끌고서 매일 아무도 없어 텅 비고 썰렁한 학교로 폴폴 먼지 나는 걸음으로 출석해 선생님과 나, 이렇게 침묵의 대면을 맞이했다.

조건은 하나, 하루에 글 한 편을 쓰는 것이었다. 학교에 나와선 어디를 가든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던지는 완전 신뢰하의 백퍼센트 자유였지만 글 하나를 완성해야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자유’가 찾아왔다. 학교는 물론 집에서도 24시간 풀타임으로 근무(?)하던 꼬마 집사는, 때로는 학교 그림이나 글쓰기가 진저리나기도 하여 어느 날은 감히 직설적으로 글쓰기가 ‘싫다’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반전처럼 떡하니 제출하기도 했다. 앞에 나를 세워두고 그걸 읽어보시던 선생님은 예상외로 마냥 미소만 지으시며, 조용히 그러나 근엄히 ‘오늘은 집에 가도 된다’라고 이르셨다. 말씀이 떨어지자 내가 교실을 막 달려나간 건 물론이다.

여느 때처럼 빈손으로 학교에 올라치면 선생님 왈, ‘작가는 빈손으로 다니는 게 아니니 적어도 대학생 노트(초등생에게)나 아무 책이라도 하나는 꼭 겨드랑이에 끼고 다녀야 한다’라고 당부처럼 꾸중하시면, 힝- 그게 뭔데요, 하면서 재빨리 숨어버리곤 했다. 사명에 찬, 투덜거림에도 너그럽고 깊으신 선생님, 사교육이라는 것이 아직 시작하기도 아득한 시절의 훈련이었던 걸 생각하면 선생님이 점점 눈시울로 그리워진다. 순수한 아이의 마음이 자주 그렇듯 일찍이 「대승음」을 탄생시킨 박인로도 천성이 문인이었다. 그는 좌우명을 꿈에서 얻었다. 말하자면 주공이 꿈에 나타나 붓으로 ‘성·경·충·효’를 써주었다고 한다. 도를 구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뜻을 두고 구할 것이며 주역도 공부할 것을 권했다 한다.

그가 41세에 지었고, 가장 널리 알려진 대표 작품은 단연 「조홍시가」(早紅柹歌)이다. 지금은 수록 필수가 아닌 작품이 돼버렸지만, 오랫동안 우리나라 고교 국어 교과서에도 수록되었기에 거의 누구나 다 아는 그 시는 효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필자도 당시 교과서에서 그것을 배웠는데 실은 ‘반중(盤中)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를 제외하면 그다음은 어떻게 공부했는지에 대한 세세한 기억은 없고 가물가물할 정도다.

그런데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297~1번지)에 자리한 박인로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 뭔가 좀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마음이 온통 그 「조홍시가」에 팔려버린 것이다. 박물관 건물이나 경치 등 평소 관심이 갔을 곳들은 다 물러나고 시간이 갈수록 조홍감만 주황색 캔버스 위처럼 환하게 전경으로 연이어 떠오른다. 또 문학관 방문이라면 요즘에는 인터넷에 잠시만 검색하면 너무나 훌륭한 소개 글과 정보가 수두룩하니, 관심은 더욱 시구로 집중된다.

조홍시가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유자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

품어 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시를 다시 대면하니 지난 시절 글쓰기로 애쓰던 날들의 사라진 시 · 공간의 텅 빔을 멍함으로 채워 넣으려는지 실연한 사람처럼 회상에 잠겨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시에 빠져 무작정 골똘해지다 보면 이건 또 무슨 일인지, 매복한 사냥꾼처럼 생각지도 않은 때와 장소에서 눈물이 덮쳐와 일이 곤란해진다. 남이 안 보는 구석에서 주머니의 휴지를 찾으며 나 자신도 스스로 놀란다.

그 시절 부모님에 대한 글쓰기 대회에서 장원했을 때마저 눈물을 흘린 기억은 없으니, 역시 부모님 사랑에 대한 진실은 돌아가신 후에야 절절히 느끼는 모양이다. 예전에는 귓등으로만 듣고 지나던 말이었는데 - 나도 예외는 아니구나 싶어 묘한 생각도 든다. 노계의 시에서 대중에게 잘 각인된 제 일 주제는 효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노계 시조가 충효나 도학적 측면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자연과의 和樂(화락)이나 안빈낙도의 삶을 노래한 부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노계 인문학 78)

또한 그런 효가 있기까지 그 배경에는 그에 버금가는 사랑이 먼저 있었음도 같이 헤아려봐야 할 것이다. 부모님의 선물 같은 무한 사랑과 그에 답하는 자식의 효. 많은 사람이 느꼈을 그 절절한 심정을 약 400여 년 전, 박인로가 주옥같은 언어로 풀어놓았다. 오히려 학교에서 공부할 때는 미처 몰랐던 감정으로 이제 다시 읽고, 느리게 음미하고 또 생각에 빠지기를 거듭한다.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

귀한 홍시가 깔끔한 소반 위, 하얀 면 받침에 담겨 정갈히 담겨 내어오는 모습, 바라보는 눈길의 지긋함, 그 순간 그리는 부모님 얼굴.

유자 아니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

중국 육적(陸績)이라는 사람이 친구 집에 왔다가, 대접받은 귤을 허락 없이 품고 가는데 아뿔싸 귤이 바닥에 떨어져 ‘들키자’ 어머님께 드리려고 귤을 숨겼다는 고백을 했다고 한다. 이 회귤고사(懷橘故事)의 육적처럼 마음이야 당장 그걸 숨겨 집으로 가고 싶지만, 동시에 집에는 어머니가 안 계심을 깨닫는데, 아, 가슴 한켠이 썰렁하다.

품어 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감을 어렵게 숨겨 가봐야 이제는 반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그걸로 슬픈 마음이 되어버린다. 당시엔 홍시가 아주 귀해 평소엔 먹지 못했다고 한다. 어디 감뿐일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이제 더는 반길 그분이 없다는 사실에 이르면 더욱 슬픔이 밀려온다. 정말이지 일이 지나고 나야 깨닫는 걸 안다. 그래서 풍수지탄(風樹之嘆)이라고 하지 않는가.

“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량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 나무는 가만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은 부모를 봉양하려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시지 않는다. 조홍감이라고 무조건 외우기만 했었는데 이 감은 6월 무렵에, 일찍 익는 상대적으로 작은 홍시라고 한다. 이것은 이가 빠진 부모님이 잘 드실 수 있다. 홍시는 참 특별하다. 몰캉몰캉, 흐물흐물하다. 농후한 과육은 조금만 방심하면 찢어지고 갈라져 흘러내린다. 익었지만, 달리 보면 익음을 지나 썩어가는 중이기도 하다. 부모님을 위한, 연로한 부모님을 연상시키는 과일, 삶과 죽음이 투명하게 공존한다.

농후한 조홍감(티스토리)

「조홍시가」, 사랑, 그리고 선물

햇살에 빛나 투명한 매끄러움, 감탄을 자아내는 호박 주황색, 너무나 투명하다 보니 홍시는 작은 원의 가두리 이미지만 남기고 사라진다. 소반이 만든 큰 원과 감이 남긴 작은 원들, 모두 텅 빈 구멍들이다.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가 그리는 물방울무늬의 빈 구멍들처럼.

야요이의 작품(Wikipedia)

떠난 사랑이 남긴 뻥 뚫린 구멍. 그곳으로 풍수지탄의 바람은 잉잉 울음처럼 불어와 마음 문을 부숴놓는다. 안 그래도 마음은 이미 금이 가 있다. 사랑의 부재가 그 사랑이 무조건적 사랑일수록 그 틈새는 더욱 벌어진다. 텅 빈 큰 틈-구멍.

품어 가 반길 이 없을 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그래서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 Lacan)은 사랑을 ‘내게 없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는 아리송한 말을 남겼다. 큰 사랑이 돌아가시면 큰 구멍을 남긴다. 경험하기 전에는 사람은 그 사랑이 남겨놓고 간, 살을 에는 바람 불어오는 틈의 구멍을 모른다. 혹독한 사랑 경험이 얽혀 있을 수 있는 두려운 공허함으로 번질 수 있는 텅 빈 무늬이기에 그런 점 무늬에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은 소위 ‘땡땡이’를 견디지 못하는 ‘환공포증’(trypophobia)을 겪는 경우도 있다.

그 대신에 틈을 모르고, 무의식적으로 틈을 피하는 사람들은 그저 빈틈없이 잘 적응하고 살아가기 바쁘다. 그래서 틈이란 자신에게는 없는, 알려지지 않은 것이 되니 자연히 빈, 틈의 사랑을 지각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타인에게 준다는 것은 더더욱 생소한 일이 되기 마련이다. 그가 사랑하는 상대는 또 그 나름대로 마찬가지다. 빈틈을 원하지 않는다. 사회 규범과 계산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일 때는 더욱 그렇다.

바로 그때 틈, 구멍이란 귀한 비밀스러운 것이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외도를 비롯해 가족 내 정서적 외상을 너무 심하게 겪은 화가 야요이는 처음엔 그것이 폭력적 트라우마로 나타났겠지만 일흔에 이르러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는 사랑에 담긴 이러한 환(環) 무늬의 비극적 비밀에 가 닿았다. 니체가 말했듯 포효하는 사자 시대를 거쳐 유희하는 어린아이로 변모하면서 그녀는 승리하는 자유의 창조력을 획득했다고 확신한다. 그녀는 현재 살아있는 예술가 중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을 내고 있다. 이로써 정신분석학의 교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금지에 초점이 가 있는 여타 치유방식은 트라우마를 금지하고 억눌러야 할 것, 어쨌든 증상 사멸을 통한 사회 재적응으로 내담자를 유도한다. 이와 반대로 정신분석은 증상을 억압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를 위한 해방의 비밀스러운 전령으로 본다는 점이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셈이 없이 다 주는 사랑의 텅 빔은 그러니까 세상의 선물과는 다르게, 그야말로 진정 값없이 주는 부모의 선물이다. 자식도 그렇게 무조건적 선물을 할 수 있을까. 부모는 돌아가시고, 자신이 자식을 둔 부모가 되었을 때야 가능할 것이다. 부모의 선물은 그 객관적 가치가 커서라기보다는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고 몽땅 그냥 주기 때문에 고귀한 진짜 선물이 된다. 예수도 ‘모든 것’으로 경배한 여인이었기에 그 선물에 기뻐하였듯이 말이다.

반대급부적 조건과 의미를 덕지덕지 붙여서 주는 것이 아니므로 텅 빔으로, 없는 것으로, 결국 라캉을 따라,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으로 선물하는 격이 된다. 아무리 그러려니 말이 그렇지, 세상에 진짜 조건 없이 준다는 게 인간에게 가능하기나 할까, ‘에이, 아마 불가능할 거야’라고 생각 들 때, 왜 데리다(J. Derrida)가 그런 선물은 과연 (불)가능한 기적이라고까지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또한, 영어로 선물을 ‘프레전트’(present)라고 하여 그 의미가 현전(現前)과 연결되는 것도 중의적 단어의 우연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바로 현전의 존재론적 공백을 뜻하기 때문이리라. 같은 맥락으로 하이데거(M. Heidegger)에 따르면 존재자(being)는 존재(Being)가 선물한 것이다. 그에게 존재는 거의 신과 같은 위치를 점유하므로 인간 존재자는 그로부터 생명이라는 숨-선물을 받은 터이다. 생명의 숨 공기가 그렇듯이 텅 빔이란 바로 텅 비었기에 어느 누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라캉이 사랑을 ‘가지지 않은 그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라고 수수께끼처럼 비틀었을 때, 그것은 무소유의 텅 빔을 주고받는 것임이 밝혀진다. 가지지 못할 그 무소유를 가지고 있을 때, 조건 없이, 그리고 그럴 수 있을 때. 여기서 바로 라캉이 말하고자 한 또 하나의,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의 (불)가능한 의미가 드러난다.

계산 없이 주는, 무조건적 사랑 선물, 기적

그런데 인간은 보통 줄 때는 받을 것을, 받을 때는 다시 줄 것을 계산한다. 데리다는, 그렇게 되면 그건 선물이 못 되고 단지 교환 체계에 갇히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그 와중에 어른인 편이 얼마간 더 부담하는 계산이 나오더라도 이미 계산은 이루어진 것이다. 선물했는데, 의도했건 아니건 오히려 답례를 조건 지우거나 지워지는 경우, 선물은 ‘독(毒)’이 될 수도 있다. 트로이 전쟁의 말 선물처럼. 이런 인간의 마음이 독(Gift)과 스펠링이 똑같은, 선물(Gift)이라는 독일어 단어에도 나타나지 않았나 한다.

트로이 목마(Wikipedia)

선물은 유상으로 교환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데리다의 지론이다. 성경의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몰라야 한다는 교훈과 같다. 그에게 선물은 교환 사슬을 벗어나는, 증여의 대상이다. ‘아빠 딸’이나 ‘엄마 아들’처럼 우리는 대개는 양쪽 부모 중 좀 더 가까운 부모가 있기도 하다. 지극한 효가 있다면 그건 달리 말해 기적에 가까운 사랑이 선재 하므로 가능한 게 아닐까 한다. 그래서 사랑은 받아본 사람이라야 줄 줄도 안다고 한다.

의미가 있는 사랑이라면 지식으로나마 배울 수 있겠지만 노계 선생이 가르치는 무조건 사랑은 공기처럼 의미가 고정돼 있지 않으니, 직접 받아보며 배우는 수밖에 없으므로 그럴 것이다. 부모님 사랑은 셈 없는 맹목적 사랑이기에 넘침이자 초과다. 정의나 진실처럼 사랑도 의미화, 경계화 없는 넘침, 그래서 일변 정신 나간 일이다.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도 진실이란 ‘미친 진실’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박인로 연구로 새로운 사실도 밝혀진다. 황충기는 몇 가지 사실들을 주장하는데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오늘날 거의 모두가 한음 이덕형이라고 알고 있는 홍시의 유명한 유래는 실은 노계가 후기에 영향을 받은 여간(旅靬) 장원광(張願光)이었다. 또한 원래 「조홍시가」라는 명칭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는 후대에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

황충기는 이어, 노계의 시가가 최초로 실린 사본, <손씨수견록>(孫氏隨見錄)을 들면서, 시가가 애초에는 4 수(首)가 아니라 1 수였으며 나머지는 후대에 덧붙여졌다고 한다. 시구도 사본과 문집본이 차이가 난다고 지적한다. 노계는 「대승음」이란 시에서도 보듯이 ‘가성(歌聖)’이라는 별칭에 맞게 그 천재성을 충효의 대표 인물로까지 끌어올렸다. 평소에는 닫혀 있지만, 문학관 뒤에는 노계를 향배하는 도계서원이 아담하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도계서원이라는 동명의 서원이 무려 다섯 개(경북 봉화군 도촌리, 경남 함안군 함안면, 전북 정읍시 이평면)나 되고 가까운 안동(경북 안동시 북후면)에도 하나 있다. 서원 앞에는 원두평 저수지를 두고 있어 더욱 운치를 더한다. 저수지를 따라 50m 정도 올라가면 그의 묘가 있다. 그의 생애와 작품은 우리에게 큰 한국 고유의 미, 새로운 생활의 미의 비전을 제시해주고 있다.

도계서원

 

판목집 팻말과 기부된 판목

노계의 묘

유명자. adlpf2005@hanmail.net

해당지역주소 : 노계문학관(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297-2)

                    도계서원(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산383)

= 이 글은 경북인문협동조합 발간 <인문학자들의 할렁한 수다>에 실린 글을 약간 수정하여 투고한 것입니다. =

인용문헌

강현국, 박숙해, '바람의 가객', 북코리아, 2017

노계박인로선생기념사업회, '노계 인문학', 도계 문화사, 2021.

노계연구총서 편찬위원회, '노계 문학세계와 문화콘텐츠화 전략', 북코리아, 2017.

전지현, 매일경제(2019.8.8) 전세계 아트페어 장악한 구사마 야요이·카우스.

(https://www.mk.co.kr/news/culture/8932630)

황충기, 早紅柹歌 硏究, 語文硏究, 15(3/4), 이데아, 1987.

영천시 홈페이지(https://www.yc.go.kr/toursub/nogye/contents.do?mId=0101000000)

조홍감 이미지:시사저널(https://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9324)

야요이 이미지(Wikipedia(https://en.wikipedia.org/wiki/Yayoi_Kusama)

트로이 목마 이미지(Wikipedia(https://en.wikipedia.org/wiki/Trojan_Horse)

그리운 어버이 이미지(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630997&code=11171369&cp=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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