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역사박물관 되찾아온 ‘영천의 문화유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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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역사박물관 되찾아온 ‘영천의 문화유산' ②
  • 지봉스님(영천역사박물관장)
  • 승인 2022.11.07 1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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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문화유산 되찾기’ 운동을 영천뉴스24와 함께 합니다.

조선 22대 정조대왕과 함께 한 영천인 조학신(1732-1800)

• 명 칭 : 정조 전교 탁본첩(正祖 傳敎 拓本帖) - 귀중 유일본

• 제작연대 : 1787년 1월 3일

• 재 질 : 닥나무 종이에 탁본

• 크 기 : 세로 38.1 × 가로 25.4cm(5장)

정조 임금이 1787년 1월 3일 춘당대에 거동한 뒤에

구순(具純)과 조학신(曺學臣)을 처벌(處罰)하도록 명한 전교를 돌에 새겨 탁본해 접는 책이다.

당시 정조 임금을 가까이에서 모신 영천인 조학신(1732-1800)과 궁궐의 수비와 왕의 시위를 담당하는 별군직(別軍職) 구순(具純)을 벌하는 내용이다. 전교를 받아 쓴 사람은 병조판서 겸 동지성균관사 신 김이소(金履素, 1735~1798)이다

이 사건의 내용은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1787년 1월 3일 기사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으며, <정조실록>에는 정조 11년 정미(1787) 1월 3일(임신) 기사에는

‘별군직 구순을 제주에, 조학신을 명천으로 정배하다.’

별군직(別軍職) 구순(具純)을 제주(濟州)에, 조학신(曹學臣)을 명천(明川)에 정배하였는데, 구순이 별군직 이윤빈(李潤彬)과 틈이 있어 사사로운 말을 적발(摘發)하여 아뢰니, 하교하기를,

“반좌(反坐)는 본래 상전(常典)이 있다. 그가 이윤빈을 얽어서 모함한 데다가 기회를 틈타서 흔들었으며, 그의 종형(從兄) 유효원(柳孝源)이 이윤빈을 동정(同情)했다고 그가 스스로 증인이 되었으니, 어찌 이처럼 음독(陰毒)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구순은 죽을 정도로 곤장을 쳐서 정배하고, 조학신은 실력이 없는 용장(冗長)으로 외람되이 청수(廳首)가 되었으니, 병조판서로 하여금 곤장을 쳐서 정배하게 하라.” 하였다.

1780년(정조 4) 무과에 급제한 노상추(盧尙樞, 1746~1829)의 관직 생활 일기에서 별군직 구순이 같은 별군직 있는 이윤빈(李潤彬)을 모함 사건에 휘말려 조학신이 처벌과 유배형을 받은 전모에 대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조의 전교 탁본첩의 내용을 살펴보면

(정조 임금) 하교하기를,

“활과 칼을 차고 대내(대궐)에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것은 그 직무가 비할 데 없이 중요하다. 만일 어떤 불량한 한 사람이 그 속에 끼여 (임금을 모시고) 있다면 그 오싹함이 어떠하겠는가.

외조(外朝 -궁궐에서 조정의 관료들이 근무하는 관청)에서 서로 다투는 것도 상황에 따라 통렬히 금해야 하거늘, 또 더구나 이 무리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구순과 조학신의 그저께 재소(齋所)에서의 태도는 매우 고약하다는 정도로만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승지, 사관, 시위, 제신들도 모두 곁에서 들었고, 또 그날 승지가 연석(筵席)에서 아뢴 일까지 있었으며, 게다가 오늘 병조판서가 처벌을 청한 일이 있었으니, 지금에 이르러 한 관청의 일이라고만 말해서는 안 되겠다.

처음에는 맨 먼저 (이윤빈의 모함을) 주창한 구순에 대해 현수(懸首-죄인을 참수한 뒤 그 머리를 걸어 전시)의 형률을 시행하여 그 무리를 징계하여, 여러 무관을 면려하려고 생각했는데, 다만 궐 안은 형률을 쓰는 곳이 아니고 삼군(三軍)도 아직 모이지 않은 탓에 할 수 없이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형편이기는 하나, 조정이 구순에 대해서 전후로 곡진히 감싸 주고 생성해 준 은혜가 모두 몇 번이었던가.

그런데 이번에 한 짓이 사람들의 이목을 더럽혔으니, 이러한데도 용서해 준다면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으며, 또 그들이 어찌 자정(自淨)할 줄 알겠는가. 남을 모함하면 반좌(反坐) 시키는 것은 본래 정해진 법이 있다.

그가 이미 이윤빈(李潤彬)을 망측한 죄로 얽어 모함하고는 기회를 틈타 이처럼 앞장서서 남을 함정에 밀어 넣는 짓을 하였으니, 이런 짓을 거리낌 없이 한다면 무슨 짓인들 하지 못하겠는가. 그중에서도 가장 못돼먹고 극히 인륜을 무시한 점은, 이윤빈과 알력을 빚자 함정에 몰아넣고 뒤이어 그의 종형(從兄) 유효원(柳孝源)이 이윤빈과 한통속이 되었다고 그 스스로 증인이 된 것으로 어찌 이처럼 음흉하고 악독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사람으로 해야 할 도리를 완전히 끊어 버렸으니 짐승만도 못하다고 이를 만하다. 지금 그 죄상이 이처럼 낱낱이 드러났는데도 만약 그의 죄를 명확하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훗날의 폐단을 수습할 길이 없을 것이다. 죄인 구순을 죽도록 곤(棍) 30도(度)를 쳐서 제주목(濟州牧)에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고, 물간사전(勿揀赦典)하라.

조학신의 경우에는, 실상은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서 곡식만 축내는 자이니, 어찌 인사(人事)로 책망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외람되이 청수(廳首)가 되었고 보면, 이미 제대로 검칙(檢飭)하지 못한 죄를 면하기 어렵다고 하겠다.

더구나 장전(帳殿 - 임금이 임시로 거처하기 위해 꾸민 자리)에서 친히 하문할 때 모두 구순이 부추긴 것이라고 일일이 자백하였으니, 또한 구별하여 감죄(勘罪-죄인을 신문하여 처벌함)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다. 그러나 그는 이윤빈과 일찍이 혈전을 벌여 원수가 된 일로 인해 장신(將臣-군영의 우두머리 장수를 지칭하는 말)인 자가 이미 연석에서 감죄하기를 아뢴 일이 있었다.

그도 사람인데 어찌 이렇게 창을 거꾸로 들고 몰래 보복하는 계책을 냈단 말인가. 가령 이윤빈이 진짜 죄가 있다면 그의 관청이 연명으로 호소하는 것도 가능하고, 서로 이끌고 나와 땅에 엎드려 간청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관청에 전해 내려오는 성헌(成憲)을 버려두고 다른 사단(事端)으로 인하여 중론(衆論)을 뿌리치고 고자질하였으니, 이 두 가지 사항은 모두 용서할 수 없는 큰 죄이다.

죄인 조학신을 병조판서에게, 곤 20도를 친 뒤에 원지 정배(遠地定配)하게 하라. 이 일로 인하여 특별히 공표할 것이 있다. 대저 그 무리의 복무하는 곳이 임금 지척이고 직책이 임금과 밀접하여 호흡이 곧장 통하는 만큼, 비록 모두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조심하면서 화평하고 공경하더라도 오히려 분수를 뛰어넘은 데 따른 처벌이나 지나친 복이 초래하는 재앙을 피하기가 어렵다.

예컨대, 구순의 무리가 저지른 죄악과 같은 것이 그의 관청에서 나왔는데, 그 무리가 비록 무식한 무부(武夫)라고 할지라도 수오지심(羞惡之心)은 타고난 천성으로 사람이면 모두가 함께 지닌 것인 만큼, 마음속에 부끄러워 그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무리가 동료 사이에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했다면, 어찌 구순과 조학신의 경우처럼 전에 없던 행동이 있었겠는가.

아울러 태거(汰去)하도록 명하여 크게 징계할 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흑백이 뒤섞일 혐의가 있으니 우선은 십분 참작하겠다. 지금부터는 조정의 눈과 귀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자연 외정으로부터 여러모로 감찰이 있을 것이니, 다시 그 관청의 ‘구습(舊習)’이라는 두 글자가 위에 전달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범한 자가 나타나는 대로 즉시 높은 장대에 목을 내걸어 한편으로는 군율(軍律)을 엄중히 하고, 한편으로는 숙위(宿衛)를 엄히 하며, 한편으로는 왕의 말을 믿도록 할 것이다. 이 전교를 병조판서가 해청(該廳)에 게시하게 하라.” 하였다.

정헌대부병조판서겸동지성균관사신 김이소(金履素, 1735~1798) 奉敎書揭

당시 왕이었던 정조는 특히 자신의 신변을 지키고 왕권의 강화를 위해 키워왔던 무관들이 서로 모범을 보이지 않고,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여 대궐에서 난동을 일으키는 모습에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남을 모함하여 무고에 빠뜨린 죄와 그들의 난동에 대해 왕이 직접 나서서 강한 처벌을 내렸다.

정조는 무고가 부르는 엄청난 결과를 직접 그의 눈으로 보았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실제 정치적 경쟁이 당파 간의 싸움으로 이어졌던 조선시대에서 무고는 상대방에 대해 단순한 도덕적 흠결을 지적하는 수준을 넘어,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문제로 비화하곤 했다.

일어난 무고 사건에 대해 연대 책임을 물음으로써, 그 스스로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를 명확히 했다. 특히 이러한 그의 처벌은 단순한 분노를 넘어, 무고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가 어떻게 처벌할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경고이기도 했다.

자신이 의지한 별군직 구순을 ‘죽을 때까지 때리라’라고 했으니, 얼마나 가혹한 명과 함께 이 “전교를 병조판서로 하여금 해청(該廳)에 게시하게 하라.”라고 한 자료가 탁본첩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유배 간 조학신은 다음 해인 정조 12년 무신(1788)년에 풀려나 관직을 받고 등용하게 된다.

▶영천 만취당 고택(永川晩翠堂古宅) - 중요민속자료 제175호(영천시 금호읍 오계리)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 지산 조호익 선생의 7세손인 조학신(1732∼1800) 선생의 집으로 만취당은 사랑채의 이름이다.
▶영천 만취당 고택(永川晩翠堂古宅) - 중요민속자료 제175호(영천시 금호읍 오계리)조선 선조 때 성리학자 지산 조호익 선생의 7세손인 조학신(1732∼1800) 선생의 집으로 만취당은 사랑채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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