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13 골화성과 금강산성
상태바
[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13 골화성과 금강산성
  • 이원석 기자
  • 승인 2020.12.05 16: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완산동 3산 대사지 골화, 5악 중사지 중악의 고장 영천
김유신 설화·황보능장 기개 숨쉬는 천혜의 호국성지

영천시 완산동 안완산마을의 한 복숭아밭 가운데에 신단(神壇)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다. 이 돌기둥을 마을사람들은 미륵이라 섬겨 이곳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고 곧잘 절을 했다고 전해오고 있다. 높이는 약 110cm 가량으로 네모반듯해 인공적으로 다듬은 듯하지만 실은 자연석이다. 돌기둥이 10m 정도 간격으로 마주 서 있는데 이 자리가 바로 대사(大祀) 3산(三山)의 하나로 추정된다.

신라 대사(大祀) 3산(三山)의 하나인 골화로 추정되는 신단
신라 대사(大祀) 3산(三山)의 하나인 골화로 추정되는 신단

삼국사기 권32 잡지1 제사조에 ‘3산·5악 이하의 명산(名山)과 대천(大川)을 나누어 대사(大祀)·중사(中祀)·소사(小祀)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신라에서 대사(大祀)의 대상으로 숭상했던 이 세 산은 신라의 영토 내의 여러 명산 중에 가장 높은 위계를 차지했다. 대사(大祀) 3산은 내력<奈歷, 습비부, 삼국유사에는 내림(奈林), 낭산으로 추정>, 골화(骨火, 영천시), 혈례(穴禮, 청도군 추정)이다. 대사 3산은 왕이 거주하는 수도 주변을 지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또 중사(中祀) 5악은 동 토함산, 남 지리산, 서 계룡산, 북 태백산, 중 팔공산<부악(父嶽)>을 가리키며 다섯 방위로 나눠 국가의 수호신을 숭배하는 산으로 지정했다.

안완산마을
안완산마을

소사(小祀) 24산은 국토방위와 지방호족 관리용으로 지정한 듯하며 상악(霜岳, 금강산), 설악(雪岳, 설악산), 화악(花岳, 화악산), 겸약(鉗岳, 감악산), 부아악(負兒岳, 북한산), 월나악(月奈岳, 월출산), 무진악(武珍岳, 무등산), 서다산(西多山, 서대산), 월형산(月兄山, 월악산), 도서성(道西城, 나성산성), 동로악(冬老岳, 덕유산), 죽지(竹旨, 죽령), 웅지(熊只, 웅산), 악발(岳髮), 우화(于火, 운암산), 삼기(三岐, 금곡산 추정), 훼황(卉黃, 단석산 추정), 고허(高墟, 금오산 추정), 가아악(嘉阿岳, 속리산 주변), 파지곡원악(波只谷原岳, 포항 청하 일대), 비약악(非藥岳, 포항 흥해 일대), 가림성(加林城, 성흥산성 추정), 가랑악(加良岳, 가야산), 서술(西述, 선도산)이다.

금강사
금강사

영천에는 대사(大祀) 3산 중 하나인 골화(骨火)와 중사(中祀) 5악에 포함되는 팔공산 중악석굴이 자리 잡고 있다.

〔전략… 유신랑은 그때 한창 고구려와 백제의 공벌 문제를 두고 밤낮으로 깊은 궁리를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백석이 그 계획을 알아차리고 유신랑에게 제의해 오기를, “공이 저와 함께 저쪽 적국에 잠입해 먼저 적의 내정을 탐지하고 나서 일을 꾀하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했다. 유신도 그것이 좋겠다고 생각되어 백석을 데리고 밤을 타서 적국을 향해 출발했다. …중략… 유신랑은 여인들과 함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수풀 속으로 들어가자 여인들은 별안간 신령의 모습으로 변신해 유신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내림·혈례·골화 이 세 곳의 호국 신이다. 지금 적국의 사람이 그대를 유인해 가는 데도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따라가기에 우리들이 그대를 만류하고자 여기에 온 것이다.… 중략… 유신은 백석을 형벌하고, 갖은 제물을 갖추어 그에게 계시를 주었던 세 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다. 그 신령들은 모두 현신해 제사를 받았다.… 후략] (삼국유사 ‘김유신 조’)

〔김유신이 이 말을 듣고 놀라 쓰러졌다가 두 번 절을 하고 나와 골화관에 들어 유숙하면서 유신은 백석에게 말했다.

“지금 타국으로 가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어버리고 왔구나. 함께 집으로 되돌아가 문서를 가져오도록 하자”며 백석을 타일러 집으로 되돌아오자 유신은 백석을 결박해 놓고 사실을 문초했다.

백석은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우리나라 대신들에게 나는 이런 얘기를 들었다. 즉 신라 김유신의 전신은 우리 고구려 국의 복술가였던 추남이다. 한번은 국경에 물이 역류하는 일이 있었다. 왕은 그에게 점을 쳐 보게 했다. 추남은 점괘를 뽑아 보고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기운이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왕은 놀라고 왕비는 대로해 이것은 요괴스러운 여우의 말이라 하고 왕에게 고해 추남을 다시 다른 일로 시험해 보아 알아맞히지 못하면 죽여 버리도록 했다. 이에 쥐 한 마리를 합 속에 감추고서 추남에게 이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고 물었다. 추남은 그 속엔 틀림없이 쥐가 들어 있고 그 쥐는 여덟 마리라고 아뢰었다. 그러자 한 마리 쥐를 두고 여덟 마리라고 했으니 그것은 잘못 맞힌 것이라 하고 추남을 죽이기로 했다. 추남은 형장에 나아가 맹세했다.

‘내 죽은 뒤에 다른 나라의 대장으로 태어나 이 고구려를 꼭 멸하고 말리라' 고, 추남의 목은 베어졌다.

합 속에 넣었던 쥐를 꺼내 배를 갈라 보았더니 그 속엔 새끼 일곱 마리가 들어 있었다. 이리해 앞서 추남이 했던 답변이 맞았음을 알았다. 추남을 처형한 그날 밤에 왕은 꿈을 꾸었다. 왕은 그 꿈에서 추남이 이곳 신라 서현공의 부인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았다. 신하들에게 왕은 꿈을 얘기했더니 모두들 추남이 맹세하고 죽더니만, 과연 그 맹세대로 실현되나 보다고 하고, 그리고 나를 이곳에 보내어 추남의 복수심의 화신인 당신을 유인하는 계략을 쓰게 했던 것이다.]

김유신이 백석을 죽이고 온갖 음식을 갖추어 세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니 모두 다 현신해 제사를 받아 흠향했다.

[“신라 말 영남의 제주(諸州)가 견훤에게 함락될 때 황보능장이 골화·도동현 등에 성을 쌓고, 이 성에 의거해 백성을 안심시키고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게 하였는데, 태조가 나라를 세우자 귀부(歸附)했고 현재 성지가 남아있다고 한다” (영양지 ‘성곽조’)]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에는 황보능장과 같은 시기, 같은 장소인, 경애왕 2년 10월 고울부에 능문이라는 장군이 나오는데 활동시기·지역·내용을 함께 고려해 보면 능장과 능문은 동일인으로 여겨진다. 9월에 견훤이 이곳에 침입했을 때 약 2개월 간 견훤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을 정도로 성의 견강함과 높은 전투력을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휘부가 있던 곳, 지금은 체육공원으로 변모해 있다.

영천시민들의 산책로와 운동코스로 올해부터 각광받고 있는 그린환경센터. 이 일대가 바로 김유신과 백석의 설화와 함께 영천을 주재하던 골화신의 호국정신과 통일신라 패망기에 자치세력을 형성해 주민들을 보호하던 금강장군 황보능장의 기개가 숨쉬던 곳이다.

표석비
표석비

영록교를 건너 그린환경센터로 가다보면 입구 왼쪽 편에 여러 가지 운동시설을 갖춰놓은 체육공원이 나온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도 무난히 금강산에 오를 수 있다.

말굽바위
말굽바위
금강산성 용천사
금강산성 용천사

길을 걸으면서 맑은 바람소리와 새소리로 자연을 음미할 수 있고 또 옛 선조들의 숨결을 느끼며 1천5백 년 전에 그들이 걸었던 길을 다시 걸어보는 감회도 맛볼 수 있다.

용남등, 용마가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남등, 용마가 났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900여m의 토석혼축 성벽과 성내에 깨어진 기와조각들이 남아 있어 당시의 웅장함을 짐작하게 하지만 무성한 나무와 풀들로 뒤덮여 흔적을 찾기는 그리 쉽지 않다. 다만 지난 95년 3월 영천향토사연구회원들과 보이·걸스카우트 1270 B.B.S 골벌지역대원들이 사방 20여 리를 조망할 수 있는 정상부분(186m)에 세운 금강산성 표석비가 길손들을 안내하고 있다. 표석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황보능장이 타고 다니다가 주인의 실수로 목 베임을 당한 용마의 발자국이 찍힌 말굽바위가 길손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고려 태조로부터 좌승이라는 관직을 받았던 금강성주 황보능장의 묘는 3사관학교 내에 있으며 경북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재, 고경면 오류리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 성재가 옛날 경주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전한다.
성재, 고경면 오류리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다녔다. 성재가 옛날 경주로 가는 길목이었다고 전한다.
장자골, 지휘부 아래 군사가 주둔했던 곳, 지형이 펑퍼짐하다. 대의리 쪽에도 성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장자골, 지휘부 아래 군사가 주둔했던 곳, 지형이 펑퍼짐하다. 대의리 쪽에도 성문이 있었다고 전한다.

완산동 뒷산을 일컫는 금강산은 금강골로 불리고 있는데 지금도 대한불교 태고종인 금강사가 80여 년 전부터 자리 잡고 앉아 당시의 전통을 이어주고 있으며 고경면 대의리 쪽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절벽과 남천, 그리고 용마바위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으나 현재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군부대에서 통제를 하고 있다.

큰 말굽바위가 있던 곳, 등산로를 닦으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작은 말굽바위의 2배가 되었으며 앞뒤발자국이 같이 찍혀 있었다.
큰 말굽바위가 있던 곳, 등산로를 닦으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작은 말굽바위의 2배가 되었으며 앞뒤발자국이 같이 찍혀 있었다.
막등. 관측소, 전체 등의 이름은 길다(경상도 사투리로 '질다')는 의미인 진등이다.
막등. 관측소, 전체 등의 이름은 길다(경상도 사투리로 '질다')는 의미인 진등이다.
저 멀리 보이는 장천, 새미들에서 군마들이 훈련을 했다.
저 멀리 보이는 장천, 새미들에서 군마들이 훈련을 했다.

금강산은 신라삼산의 하나로 비정되는 곳으로 안완산동의 구릉지는 골화소국의 중심부이고 대사(大祀)를 올린 곳으로 추측된다. 안완산 철길 건너편 산의 북쪽 사면에는 20여기 이상의 규모가 큰 고분들이 무리 지어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발굴 작업이 완료되면 골벌국의 실체를 밝혀줄 중요한 자료가 출토될 것으로 보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