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회 찾아가는 역사박물관 전시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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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찾아가는 역사박물관 전시 개막
  • 이원석 기자
  • 승인 2020.12.02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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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 당시 참여한 의병들의 급여 기록한 문서 최초공개

∙ 이순신의 명량과 같은 의미를 지닌 영천성수복전투

∙ 429년 전 의병의 일당(급여)은 얼마일까?

∙ 의병 3960명의 식사를 위한 취사병은 몇 명?

∙ 의병으로 동아시아 최고의 정예병을 물리친 작전은?

∙ 이때 죽인 517과의 왜병 목은 어디로 갔을까?

영천역사박물관(관장 지봉스님)의 ‘제19회 찾아가는 역사박물관’ 전시회가 영천시의 후원으로 7일부터 개최된다.

그동안 박물관에서는 여러 차례의 찾아가는 전시회를 통해 경북민들이 국가가 어려운 시기에 보여준 뛰어난 애국정신과 시대정신의 원동력인 ‘화합’을 오늘날 대한민국 안에서 ‘경북중심(慶北中心)정신’으로 되살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1592년 동북아시아 국제전인 임진왜란에서 경북 10개 지역민이 함께 왜군에게 점령당한 영천성을 최초로 수복한, 영천성수복전투 관련 자료를 발굴했고 그 역사적 기록에는 아래와 기술되어 있다.

『선조실록』 1592(선조 25)년 9월 14일 기사에 ‘영천성(永川城)을 수복한 공로는 이순신의 공과 다름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병조판서였던 백사 이항복의 「백사별집」 권4, 「논난후제장공적論亂後諸將功蹟」에서는 ‘영천성 수복전투와 이순신의 명량은 임진왜란 중 가장 통쾌한 승리였다.’ 고 적혀 있다.

그리고 『선조실록』 1603(선조 36)년 2월 12일 기사에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전이 수공이고 육지에서는 권율의 행주전투와 권응수의 영천성수복이 조금 사람들의 뜻에 찬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북 의성의 유학자 신흘이 1604년 편수청(현 국가기록원)에 올린 『난적휘찬』 기록에는 “일본군과 싸워 승리하는데 공을 세워 군대의 명성을 조금이라도 떨친 것은 진실로 영천성 수복전투가 처음이며 이 승리는 경북민의 마음에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일어나게 한 전투이다.” 라고 기록해 조선의 임금인 선조에게 보고했다.

그동안 영천성수복전투에 관련된 조명은 복재 정담(鄭湛)의 「영천복성일기」와 권응수의 「백운재실기」 권2에 있는 복재 정담(鄭湛)의 「영천복성기」 기록을 저본(底本)으로 해 조명해 왔으나 또 하나의 중요한 자료가 발굴된 것이다.

위의 기록을 찾아낸 영천역사박물관은 오랜 기간 동안의 영천 임란사에 대한 사료 발굴과 기초연구도 진행 중인 가운데 최근 이 전투에 참여한 정확한 인원·의병의 상황·식량 수급 상황을 기록한 자료를 다시 찾아냈다.

그동안 학계나 지역에서는 전투에 참여한 인원이 3560명이라고 알려져 왔으나 당시 군수물자를 담당한 양료관 홍경승의 『혼암선생실기』, 「분의록」에서 영천성 수복전투(27일)를 치르기 이틀 전인 1592년(선조 25) 7월 25일 3960명이 참여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이날 이후 의병의 수에 관한 날짜별 변화도 찾아냈다. 또, 영천성 수복 당시 전투 과정에서 장수와 특공대 격인 돌격장, 각 지역의 의병장, 의병, 노약자 등의 일당(하루급여)이 얼마인지도 밝혀내어 흥미로운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경승의 <분의록>에는 7월 23일부터의 일당을 밝히고 있는데 하루 배급량은 상장(上將軍 - 정3품 이상)인 권응수 의병대장에게는 쌀 1말과 고기 3근, 전봉별장(前鋒別將 - 선봉장)인 군위 부계출신 홍천뢰에게는 쌀 2말에 고기 4근, 기타 여러 지역의 의병장들에게 쌀 8되와 고기 2근, 장정인 일반 의병은 쌀 6되와 고기 2근을 주었다. 특히 노약자에게 쌀 3되와 고기 2근을 지급했는데 전투병의 뒤에서 여러 가지 잡일을 하는 사람에게 준 것으로 적혀 있다.

임란 당시 제승방략체제에서 일반 병사에게 2되~3되 정도의 일일 배급량 지급으로 보았을 때, 영천성수복전투에서 일반 장정의 쌀 배급량은 지나칠 정도로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전투의 가장 앞에 서서 죽음을 불사하는 선봉장인 경우, 상장군보다 더 많은 배급량으로 보아 위험수당까지 지급한 것이 아닌가 라는 추측과 동시에 안정적인 식량배급으로 보아 전투에 임하는 창의정용군 구성원들에게 배부르게 먹고 싸울 수 있다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보장한 것으로도 보인다.

또 한 가정에 중요한 생산 구성원 1명이 빠져나간 자리를 많은 양의 쌀과 고기를 지급함으로써 가정으로 전해줄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집을 걱정하지 않고 전투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아닐까? 이 점에서 권응수 의병장과 더불어 그 부대가 뛰어난 장수였음을 알 수 있는 한 부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창의정용군(의병) 3960명의 식사를 마련하는 취사병은 몇 명이었을까? 기록에는 물 긷는 사람 69명, 땔감구하는 사람 42명, 밥하는 사람 33명, 이 모든 숫자는 3부대로 나눌 수 있는 숫자가 된다. 식사와 관련해 밀접하게 편제한 인원은 총 144명이다.

1592년 7월 25일 3970명의 창의정용군을 3부대로 좌총 신해, 중총 정대임, 우총 최문병으로 나누었고 한 부대를 약 1320명 정도로 볼 때 각 부대마다 물 깃는 사람 23명과 땔감을 구하는 사람 14명, 밥하는 사람 11명으로 나눌 수 있다. 치밀한 계획을 통해 유기적인 조직을 만든 것으로 이것만 보아도 체계적인 부대조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사를 전문으로 수집·연구하는 영천역사박물관 관장 지봉스님은 “임진왜란 최초의 수복전투는 의병이지만 지휘관들의 뛰어난 리더십이 만든 공성전 승리로서 그 승리의 원동력과 비밀을 발견할 수 있는 전시회에 많은 분들의 관심과 방문이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회는 12월 7일부터 2월말까지 영천시 도림동 소재 영천역사박물관 전시관에서 열리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월요일 휴무) 관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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