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 선생님 추모기 - 님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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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 선생님 추모기 - 님을 보내다
  • 권대섭(프레스아리랑 대기자)
  • 승인 2020.10.30 2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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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되신 스승님 우리 가슴에 부활하시니
달뜨는 '달밝골' 너머 해뜨는 마루에 계시다

영천문화·교육계의 큰별 조진호 선생이 지난 3일 영면하셨다. 산동중학교 교장, 영천향토사연구회 고문 등 일평생을 영천사랑으로 일관했던 고인을 기리면서 제자인 권대섭 프레스아리랑 대기자가 쓴 추모기를 게재한다.<편집자주>

선생님 산소에 도착한 시간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서울에서 KTX를 탔는데도 그랬다. 발인이 끝난 이튿날 저녁이다. 능계 온천 신안사람들이 걸어서 자천장에 가던 산길 지름길을 따라 고갯마루 왼쪽 언덕에 모셔졌다. 따님이신 영애 누나가 안내해 주셨다.

고인의 묘소
고인의 산소

산소로 오르는 골짜기를 '달밝골'이라 했다. 고즈넉한 골짜기에 고요히 물을 담은 연못이 있다. 달밝골 못이다. 골짜기 이름도, 못 이름도 운치가 있다. 아름다운 곳이다. 아름다운 곳은 사람들이 금새 알아보는 법. 누군가 못가에 별장을 지어놨다.

옛날 걸어서 자천장 다니시던 우리고향 어른들이 늦도록 장을 보다가, 장터에서 만난 사돈어른과 또는 반가운 친구와 대포 한 잔 거하게 기울인 날들이 있었다.

그런 날엔, 늦게 집에 오던 밤이 있었다. 그 밤길에 오동거랑 건너고 보리밭둑 너머 이 골짜기에 이르니 달이 훤했다.

골짜기가 달빛을 모아온 듯, 오목한 골에 달빛이 요요하면서 편안한 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 골짜기, 달빛길을 기억한 사람들이 그때부터 입에서 입으로 달밝은 골짜기, 달밝골 달밝골 하다가 '달밝골' 이름이 되었다.

팍팍한 삶 속에서도 한편의 시이며 그림 같은 땅이름을 남길 줄 알았던 우리 고향사람들의 그 달밝골 고갯마루 왼쪽 언덕에 선생님이 묻혔다. 다른 곳에 계시던 사모님도 이장하여 나란히 묻히셨다. 무덤앞에 서니 어둠이 내렸다. 전통적 풍수지리로 좌청룡 우백호를 거느린 산사면에 하루종일 햇빛이 드는 곳이라는 영애누나의 설명이었다. 선생님의 타계를 비로소 실감나게 하는 현장이었다.

산동교정 교단위에 무릎이 약간 나온 듯한 바지에 허름한 양복 걸치시고, 특유의 희끗한 눈썹 빛내시며 우리들을 훈육하고 가르치시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그런 모습이셨다.

오래된 가죽가방도 어깨 메셨다. 그런 모습으로 질구지 길지나 파데이 골짜기로, 능계 고갯길을 걸어서 학교로 오가셨다. 또 어떤 때는 능계 거랑길을 따라 백학학원을 더듬으며 한천 앞산너머 '한갓'으로 불린 언덕 오솔길로 출퇴근하셨다.

우리고향 어느 길, 어느 개천, 어느 강변, 어느 산이든 선생님 발길 눈길 아니 스친 곳 있겠는가. 그렇게 선생님의 발길 눈길 손길 마음길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런 선생님이 무덤에 계셨다. 누구나 맞이할 생과 사의 극명한 갈림이 분명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고요한 저녁, 어둠에 묻힌 선생님 산소였다.

선생님은 우리들 교실에선 생물 한문 일어...닥치는대로 가르치셨다. 분필가루가 손에 범벅이 되도록, 나갈 종이 쳤는데도 쉼없이 설명을 거듭하셨다. 어떤 때는 다음 시간이 되어서야 교실을 나가셨다.

그런 어느 날, 수업 끝나 집으로 향하던 산동 여학생들을 대성당 앞에서 붙잡았다. 꽃처럼 피어난 아름다운 학생들이었다. 학생들 입장에선 붙잡힌 셈이었다.

"오늘밤은 달이 뜬다. 달이 뜨면 달맞이꽃도 핀다. 애들아, 그 달맞이꽃 보고 가거라. 나하고 같이 보자"

선생님은 그렇게 학생들과 어울리고 싶었다. 무엇이든 제자들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학생들과 놀고 싶었다. 선생님이 학생들과 노는 방법은 특이했다. 학생들은 그걸 알고 있었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산소가는 길목에 있는 달밝골 연못
산소가는 길목에 있는 달밝골 연못

달을 기다렸고 달을 맞았다. 달맞이꽃도 맞았다. 선생님과 제자들이 함께 한 달빛수업이었다. 달맞이 꽃맞이 아련한 '잊지 못할 밤'이었다. 예의 선생님의 설명이 시작됐다. 달맞이꽃의 학명은 무엇이고, 원산지는 유럽과 아시아를 거쳐 북미대륙에서도 핀다. 왜 달맞이꽃인지 전설을 들려줄께...

옛날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 중에 홀로 달을 사랑하는 요정이 있었다. 별이 뜨면 달을 볼 수 없었던 요정이 어느 날 말했다. "별들이 없어졌으면 좋겠어. 달만 뜨면 좋겠어"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별을 사랑하는 요정들이 신에게 일러 바쳤다. 화가 난 신은 달을 사랑하는 요정을 달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쫒아버렸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달이 자기를 사랑하는 요정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신의 방해로 쉽게 찾지 못했다. 기다림에 지친 요정은 그만 죽고 말았다. 이를 본 신이 너무했다 싶었던지 죽은 요정을 꽃으로 환생시켜 주었다. 그리고 달이 뜨면 만나게 해주었다. 밤새도록 만나도록 해주었다.

그날 밤 산동소녀들은 달맞이 꽃과 달의 사연을 처음으로 들었다. 그리고 달맞이꽃처럼 아름답게 기다림과 인내, 사랑을 아는 꽃들로 피어났다. 이런 선생님이셨다.

부족한 제자가 절 두번 묵념 한번에 선생님을 추모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누구나 가야 할 길, 맞이하고야 말 날을 맞으신 선생님과 우리네 인생무상을 동시에 느끼며 산소에서의 발길을 돌렸다. 날이 어두워져 주변 풍수나 풍광을 자세히 살피진 못했다. 다만 선생님은 그래도 우리 산동인의 가슴에 영원한 빛으로 남으셨음을 달밝골 달빛과 하루종일 햇빛들 그 해님이 말해 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은 해님이자 달빛으로 우리 속에 부활하실 것임을 믿어마지 않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엔 혼이 없다...역사관이 없다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 자택에 다시 들렀다. 30여년 전, 해병대 연평부대 시절 부대 사격대회에서 운좋게 총을 잘 쏜 적이 있다. 저격수 칭찬을 들으며 정기휴가 25일, 포상 휴가 7일, 장장 32일간 휴가를 받았다. 이때 선생님 자택을 찾은 적 있다. 1985년 2월의 일이다. 5월 제대 예정이었으니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선생님 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 그 집이 그대로였다. 소마굿간이 없어졌고, 현대식 주방이 되어 있었지만 선생님과 밤 이슥도록 이야기했던 방은 그대로다. 청마루며 나무기둥이며 흙벽이며 뒷단장도 그대로였다.

30여년 전 그날 밤이 떠올랐다. 설을 쇠고 정월 대보름을 앞둔 2월의 봄밤이다. 귀촉도 두견새 부이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이 일제시대 일본어로 된 초등 4학년 지리 교과서를 꺼내셨다. 일본지도와 태평양과 동해가 표시된 페이지를 펼치시더니 말씀하셨다.

"일본선생들은 학생들에게 태평양 넓은 바다를 자기들 앞마당이라 가르쳤다. 우리나라 동해는 자연히 뒷마당이 된다. 저들은 자기들 앞마당을 미국이 가지고 놀아선 안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책임론을 떠나 일본은 지리교육에서도 자기들 정신과 사상을 가르쳤다. 혼이 있는 지리교육을 했다. 이 책에 그래 쓰여져 있다"

여기까지 말씀하시고는 잠시 멈추셨다. 나는 다음 말씀이 궁금했다. 눈에 긴장이 왔다. 그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교육에는 혼이 빠졌다. 지리교육에선 지리만 말하고, 역사교육에선 사실만 말한다. 지리정신이 없고, 역사관이 없다. 지리만 말하고 사실만 나열하느라 혼이 없어졌다. 정신과 사상을 빼놓았다. 껍데기만 가르쳤다...권군은 우얘 생각하노..."

수업시간엔 잘 들을 수 없었던 말씀들이 거침없이 나오셨다. 두 말이 필요없었다. 나는 긴장된 눈을 껌벅이며 "선생님. 더 말씀해 주십시오"를 연발했다. 그런 밤이 깊어갔다. 돌아올 때 선생님은 능계 고갯마루까지 바래주시며 말씀을 계속하셨다. 달이 훤한 밤이었다.

나는 이날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일본과의 독도문제에선 나라예산 47억원을 들여 만든 '동북아시아 역사지도'에 우리나라 영토인 독도표시를 기어코 빼놓고 만들어 빈축을 샀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한 짓이다. 정신나간 식민사학자들, 친일매국노, 역사학계를 장악한 '토착 왜구들'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남북분단 문제에선 국권(군사주권, 외교주권)을 스스로 강대국에 맡기고 찾을 생각은커녕, 오직 남북간 적대와 분단을 전제로 한 외세와의 동맹강화와 대결에만 방점을 두어왔다. 이러니 일본이 중국이 미국이 우리를 우습게 보는 것이다. 나라가 편할 날이 없는 것이다.

갈라진 나라 하나되는 길에도 선생님 말씀은 여지없이 유효하다. 사회주의와 북에 대한 지나친 편견과 공포에 세뇌되어 미국 승인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된 배경엔 선생님이 지적하신 혼이 없는 교육, 정신과 사상이 빠진 껍데기 교육이 광복이후 75년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광복이후 지금껏 진정한 광복을 이룬 적 있던가? 선생님 말씀에 비추어 질문을 던진다.

영애누나가 차려주신 저녁을 먹었다. 누나는 선생님이 사기당한 이야기를 가감없이 들려주었다. 어느 날 안동 농림학교 후배라며 어떤 이가 찾아왔다. 모교후배라니 껍뻑죽은 선생님은 그 사람을 의심없이 상대하셨다.

일주일 동안이나 손님으로 대접하며, 소장하고 있던 많은 자료들과 있는 책, 없는 책을 전부 꺼내 설명하시곤 빌려달라니 흔쾌히 내주신 것이다. 가보급 문서도 그때 나가고 돌려받지 못했다.

선생님이 집을 비운 사이 도둑이 들어 또 한 차례 귀한 책과 자료들이 없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만큼 순박하고 인심이 후하셨다. 사기꾼은 남을 돕고자하는 선생님의 선의와 순진무구함을 역이용한 것이다. 대부분 사기꾼들이 다 그런 것이다.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스승 다니시던 길따라... 전진하는 산동 건아들

밤이 늦어 떠날 시간이 됐다. 코로나 때문에 추석때 가지 못한 중리(구마리)집 노모님만 뵙고 팽하게 서울로 갈 일정이다. 영애누나가 능계 고갯마루까지 바래주셨다.

30여년 전엔 달빛 훤한 밤에 선생님이 바래어 주셨는데, 이번엔 칠흑같은 밤에 따님이 대신하고 있었다. 선생님 안 계신 세상이 캄캄한 밤길 같음을 상징하는 순간이다.

무섭다며 한천 가는 길로 가라고 누님이 권유했다. 순간 나는 옛날 달빛 훤한 밤, 으쓱하기로 유명한 파데이 골짜기 공동묘지 앞에 나타나 내 총각을 따먹고 간 처녀귀신을 떠 올렸다. 오늘밤도 혹시 하며 골짜기로 내려섰다. 만나면 만나리라. 귀신잡는 해병이라며 누나 앞에 객기를 보이고는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무 캄캄했다. 선생님이 지켜주시겠지 하며 노래가사를 만들었다.

"선생님 안계신 세상 캄캄한 밤길 같아도

산동교정 하시던 말씀 빛이 되셨습니다.

우리 가슴에 영원하실 영원한 그 빛따라

씩씩하게 가렵니다 살아가렵니다.

어둠속에 거친 세상 두렵지 않습니다.

어둠뚫고 밝은 세상 만들어 갈랍니다.

빛이 되신 선생님 우리 스승님...

기어이 승리하는 산동 건아들..."

한 자락을 뽑자 어느덧 공동묘지 앞이었다. 진짜 파데이 골짜기가 시작되는 곳이다. 오싹하게 좁은 계곡길이었다. 하지만 포장되어 넓은 길로 변했다. 선생님도 오래된 가죽가방 하나 메고, 도깨비가 나타나면 검도로 물리치겠다며 신문지를 똘똘 말아 쥐고 넘으셨던 골짜기였다. 나로서도 꿀릴 건 없었다. 질구지 쪽으로 골짜기 양쪽 산은 모두 우리문중 선산이 아닌가. 조상들이 잠들어 계신 곳이다.

밤길 혼자 걷는 약간의 쓰릴을 즐기며 질구지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은 사실 선생님께서 수십 년을 걸어 다니신 길이다. 나는 선생님이 다니셨던 길을 따라 나도 모르게 어둠뚫고 밝은 세상 향해가는 산동건아들의 전진을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행했던 것이다. 슬프고 먹먹하지만 우리 가슴에 빛으로 부활하신 선생님은 오래도록 그렇게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2020. 10. 10 제자 권대섭 감히 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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