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4 잠계 이전인 묘소, 장산서원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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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4 잠계 이전인 묘소, 장산서원 터
  • 이원석 기자
  • 승인 2020.06.19 12: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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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계가 없으면 회재가 없었다” 일평생 부친 봉양

“잠계가 없으면 회재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전인의 일생은 오직 아버지의 봉양에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잠계 이전인의 묘소(영천시 임고면 수성리 영인마을)
잠계 이전인의 묘소(영천시 임고면 수성리 영전마을)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 1516-1568)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의 서자로 이언적 생존 시 옆에서 봉양하며 가르침을 받았고, 부친이 남긴 시와 문을 모아 회재문집을 편찬했다.

영전재
영전재

회재 이언적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영천시 임고면 수성리 영전마을 이전인의 묘소를 찾았다.

재사인 영전재(苓田齋)에는 찾는 이가 별로 없는지 조용했고 옆으로 들어가 산길로 10여분 걸으니 최근에 잘 단장한 것으로 보이는 잠계공 이전인의 묘가 나타났다.

회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인 잠계 선생은 천성이 온아하고 성효가 지극하며 10세 때부터 아버지에게 강학 수업했으며 21세 때 서천잠(誓天箴)을 지어 “차라리 성인을 배워 미치지 못함이 있더라도 한 가지 기예(技藝)나 선(善)으로 이름을 이루지 아니할 것”이라며 진실한 학문에 전념하고자 했다.

부친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가실 때 따라가서 7년간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유배지에서 별세했을 때는 홀로 수천리 길의 고향인 경주까지 유해를 운구해 장례를 치렀다.

시묘 삼년 후에는 지극정성으로 효심을 다해 부친의 뛰어난 학행을 세상에 널리 알려 훗날 영의정에 추증되어 명종 때 문묘에 배향되고 동방오현에 이르게 했다.

장산서원유허비
장산서원유허비

퇴계 이황 선생이 잠계공은 모습과 언행이 부친과 흡사하고 출중하다고 평하며 ‘잠계’라는 호를 지어 주었으며 효를 본받은 아들 구암(求菴) 이준(李浚, 1540-1623)과 치암(癡菴) 이순(李淳, 1544-1580)의 도움으로 시서 등 많은 글을 ‘잠계집(潛溪集)’에 남겼고 사후 통훈대부(通訓大夫)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추증되었으며 지금까지 장산서원(章山書院)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산림유전자원보호수(은행나무) : 1780년 장산서원 건립 시 기념식수목
산림유전자원보호수(은행나무) : 1780년 장산서원 건립 시 기념식수목

묘소에서 내려와서 수성리 경로당에 주차한 후 고속도로 교량 밑을 지나 옛 장산서원 터로 향했다. 장산마을 구터에는 장산서원 유허비와 산림유전자원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와 향나무가 긴 세월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산림유전자원보호수(향나무)
산림유전자원보호수(향나무)

1780년(정조 4)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곳에 창건해 위패를 모시고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

장산서원
장산서원
초요문

후손들에 의해 장산마을 뒤로 위용을 자랑하는 천장산과 도덕산, 자옥산 너머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2006년 11월 장산서원이 복원되었는데, 묘우는 선계묘(善繼廟), 강당은 지습당(智習堂), 동ㆍ서재는 심고재(尋古齋)와 지사재(志思齋), 삼문은 초요문(超邀門) 그리고 경각(經閣)과 관리실이 있다. 2007 '경주시건축상'을 수상할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심고재
심고재
경각
경각

장산서원 편액글씨는 박광보, 선계묘ㆍ지습당ㆍ초요문은 박양보가 썼고 심고재와 지사재는 박군환, 경각은 임고서원장을 지냈던 최채량이, 복향 상량문은 권헌조, 복향 기문은 이영원, 복향문은 조양시사장을 역임한 이진기가 썼다. 제향은 매년 3월 초경일(初庚日)에 행한다.

선계묘
선계묘

잠계 이전인의 흔적은 독락당 입구의 기적비와 후손이 살고 있는 독락당, 약쑥밭 등에 남아있다.

잠계 이전인의 후손이 살고 있는 종택인 독락당
잠계 이전인의 후손이 살고 있는 종택인 독락당

답사 도중에 옥산서원에서 만난 손주남 경주시 문화관광해설사는 “잠계 선생의 묘소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는데 귀중한 내용을 알게 되어서 감사하다”며 “옛날과 행정구역이 달라진 만큼 경주와 영천이 함께 찾아서 보존해야 될 자료 발굴을 위해 협력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전인 선생이 강계 적소에서 회재 선생을 시측하고 갖고 온 중국산 약쑥, 지금은 국내약쑥과 혼성이 되어 있다고 한다.
이전인 선생이 강계 적소에서 회재 선생을 시측하고 갖고 온 중국산 약쑥, 지금은 국내약쑥과 혼성이 되어 있다고 한다.

장산서원을 당시 경주 땅이었던 수성리 장산마을 옛터에 복원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문중에서는 부친인 회재 선생을 기리는 옥산서원과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는 독락당 옆에 함께 자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었으리라.

잠계 이전인 기적비
잠계 이전인 기적비

앞으로 인근 지역과의 문화유산을 함께 정리하고 찾아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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