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석의 도쿄통신 61 - 사무라이(侍)&무사
상태바
박정석의 도쿄통신 61 - 사무라이(侍)&무사
  • 박정석(도쿄 거주)
  • 승인 2020.04.19 09: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본은 칼의 문화다

한자(漢字) 문화권에서의 우리 환경은 오랜 세월 사람의 지위를 상하로 구분해왔다.

물론 인류사가~

ㆍ사농공상(士農工商)

사전적 풀이는 '선비(士), 농부(農), 공장(工匠), 상인(商) 네 가지 신분을 표기할 때 쓰던 말이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서 같은 한문을 두고 동일하게 해석, 사용되지 않았음은 문화의 발전사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특히 사(士)라는 글자이다. 한국은 선비를 나타내는 사(士)문화였으나 일본은 무사계급인 <사무라이(侍)>를 나타내는 사(士)문화로 발전했다. 그런데 우리가 명확히 모르고 자주도 두리뭉실하게 지나가는 일본의 단어가 같은 칼잡이인 <무사와 사무라이>

다. 간단히 말하면 자위를 위한, 혈연적 지연적 특정한 조직에 속해서 칼만 차면 누구나가 무사였다. 그러나 칼만 차면 누구나가 <사무라이>라는 지위의 명예는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좀 더 살펴보자. 사(士)는 같은 한자어로서 한국어에는 문(文)의 뜻이, 일본어에는 무(武)라고 하는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는 조선의 사대부와 일본의 전국시대를 상징하는 듯 무사라는 큰 차이를 가진다. 그러나 같은 부분은 전통사회의 지도 계급이었고, 엘리트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일본의 사무라이의 어원과 종류 정신 등에 대해서 알아보자.

<사무라이(侍)>

이 어원은 일본의 봉건주의 사회에서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본래 귀인(貴人)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이를 경호하는 사람을 일컬었다. 일본에서는 제50대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 794~1192, 398년간) 때 수도를 교토로 옮기고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될 때까지를 말한다. 이 시대는 귀족의 이미지가 강한 시기로 헤이안 말기에 역사 속 무사라는 신분이 탄생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또 헤이안 시대를 연 간무 천황은 어머니가 백제계 도래인이었다.

한편으로 다음 시대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85~1333, 148년간) 막부법(幕府法)에서는 구체적으로 <사무라이>는 말을 타는 자격이 있는 무사를 가리켰고, 범죄를 저질러도 형벌은 일반서민과는 구별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 무사계급이 많이 발달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8~1573, 237년간)에 보다 더 <사무라이>라는 위치가 정리되어 갔다. 구체적으로는 사무라이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서 신분의 정의가 보다 격상되어 갔다. 당시 일반적인 사무라이의 정의는 무력을 가지고 주군을 섬기는 자를 불렀고, 총칭 상급무사를 지칭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1603~1868, 265년간)  막부에서는 사농공상의 네 부류의 신분이 어느시대 보다도 엄하게 규정되었다. 에도시대 260년간 더 구분되어지며 사士에 해당하는 부류에 사무라이 호칭이 명예로 주어졌다.

그러나 무가사회 내부에서는 더 세분화 되어 있었다. 그만큼 사무라이의 명예가 귀히 여겨지며 무사 중에서도 비교적 상층계급을 사무라이라고 했다. 또한 무가(武家)를 주군(主君)으로 섬기지 않는 특수한 사무라이로 궁가(宮家)에 봉사하는 미야사무라이(宮侍), 몬제키(門跡 : 격이 높은 사원)에 봉사하는 데라사무라이(寺侍) 등이 있었다.

*여담 - 주군을 5번정도 바꾼 경험이 없으면 사무라이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역사 속에 시대를 나누는 것은 기록에 따라서 몇 년씩 겹치기도 한다.

※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