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아리랑 대마도 태극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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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아리랑 대마도 태극기요’
  • 송명호 태극기선양운동중앙회 상임고문ㆍ시인
  • 승인 2008.08.11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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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일부터 3일까지 대마도 이즈하라항에서 열렸던 401회 조선통신사 행렬과 아리랑 축제 진도북춤한배예술단 공연프로그램에 참가한 태극기선양운동중앙회 송명호 상임고문의 기행문이다.

이즈하라 시내에서 만난 송 상임고문은 통신사행렬 후미 공연단을 인도하는 기수로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내를 지나 행사장까지 도보중 많은 카메라와 특히 NHK TV와 아사히 TV와 인터뷰했던 장면은 우리 태극기의 당당한 모습이었다.<편집자주>


올해로 401회를 맞는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서른 두 명의 진도북춤 한배예술단원 속에 끼어 아침 여덟시 반에 부산국제부두항을 출발하여 이즈하라항에 도착한 시각은 열한시쯤이었다. 날씨가 너무 맑고 파도마저 잔잔하여 뱃길이 순탄하고 편안했다.

▲ 가미자카 시비앞에 태극기를

예술단원 중에 목포 문화방송국 김희준 부장은 방송 취재, 구홍덕 박사와 김영준 선생은 사진 촬영 등 나름대로 임무가 있었지만 나는 딱히 정해진 것이 없어서 기회가 되면 준비해 온 태극기로 무엇인가를 해볼 참이다.

박흥일 단장은 며칠 전 작고하신 진도북춤예능보유자이신 박관용 명인의 아들로 대를 이을 진도북춤예능 이수자이다. 그런가 하면 나이가 가장 어린 정진이는 박 단장의 아들로 대학생이다. 3대째 혼이 이어지고 있는 진도북춤의 진수가 대마도 아리랑 축제 무대에서 질펀하게 펼쳐질 모양이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체류 기간 동안 예약한 전세 버스에 올랐다. 이번 행사 기간 동안 모든 일정을 맡고 있는 여행사 주정훈 소장이 차내 마이크를 잡더니 지금 곧 바로 금석관 호텔 식당에서 뷔페식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내일부터는 공연 관계로 단체 여행이 어려우니 가까운 명소 몇 군데를 둘러 본 다음 숙소로 갈 것이라고 미리 일러둔다.

숙소라고 해야 민박집 두 군데라고 한다. 대마도 규모가 길이 80킬로미터, 폭 16킬로미터에 인구 4만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섬인데다가 한국 사람이 아니면 여행자가 별로 없다보니 마땅한 호텔도 없고 해서 민박집 두 군데를 얻어 놨으니 불편하지만 살 부대끼며 묵어 달라고 양해를 부탁한다.

▲ 소우다케유키와 덕혜옹주

외국 여행 다닐 때마다 호텔에서 묵었던 터라 비록 3박 4일 여정이지만 명색이 일본인데 민박집도 괜찮을 성 싶었다. 점심을 마치고 예술단원을 실은 버스가 닿은 곳은 가미자카 전망대였다. 한눈에 들어 온 것은 덕혜옹주와 정략 결혼한 것으로 잘 알려진 대마도 마지막 도주의 손자 소우타케유키(宗武志)의 시가 새겨진 검은 돌의 시비이다.

소우타케유키하면 우리나라 역사상 비운의 덕혜옹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덕혜옹주는 당시 환갑이 넘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가장 가까이 모시던 궁녀 양귀인(梁貴人)과의 사이에서 1912년 5월 25일 태어났다.

조선왕조의 국운이 점점 기울어지자 고종황제는 영친왕이 이미 일본 여자 마사코를 며느리로 맞이한 전례가 있어 이번에는 그리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덕혜옹주의 배필로서 민씨 집안의 신랑감을 점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알아챈 일본은 덕혜옹주 19살 되던 해 서둘러서 소우타케유키와 강제로 혼인을 시켜버린다.

그런 사연으로 덕혜옹주와 소우카케유키의 결혼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소우타케유키는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 후 마사에마저 원인 불명으로 죽게 되자 덕혜옹주는 자신의 고단한 삶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정신질환을 이기지 못해 투신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1962년 1월에서야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와 낙선재에서 1989년 4월 21일 영면하여 유해는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유릉에 묻혔다.

시비의 글은 소우타케유키가 생전에 이곳을 들려서 느낀 소감을 표현한 것으로 인간이나 역사는 부질없는 것이며 자연과 더불어 윤회하는 것임을 담담히 토로한 것으로 마치 자기의 생을 예감하는 듯 하였다.

이 시비 앞에서 덕혜옹주의 비운을 생각하며 가방 속에 든 태극기를 꺼냈다. 그러자 예술단원들이 몰려와 태극기를 펼쳐 놓고 기념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아마도 대마도 여행길이 열리면서 이곳에 태극기가 나타난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시비 위쪽의 전망대에 오르면 탁 트인 바다와 대마도에서 제일 높다는 648미터의 아따떼 산이 가까이 보이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대마도 공항이 보인다. 여기에서도 태극기를 펼쳐 놓고 몇 차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다음은 코마다하마신사로 발길을 옮겼다. 고려 말 1274년 10월 마산을 출발한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이 일본 점령을 위해 처음으로 상륙한 곳이다. 당시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과 일본의 전쟁은 아주 치열하여 일본군인 1만여명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원혼을 달래기 위해 신사를 세웠는데 일본에서는 군인의 위패를 받들고 추모한 신사로는 코마다하마신사와 야스쿠니신사뿐이다. 안내판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로 표시하고 또 음성 시스템을 통하여 한국말로도 들려준다.

아유모도시 공원을 가는 농촌 시골 길에 돌이 얹힌 지붕이 있는데 이시야네라고 한다. 5톤이나 되는 납작돌을 얹어서 만든 이 집은 곡식 창고로 쓰이는데, 바람 많은 섬사람의 무지막지한 지혜를 발휘한 것 같았다. 강원도에 너와집이 있다면 대마도에는 이시야네가 있는 셈이었다.

아유모도시 공원은 원시림과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휴양지로 초록빛 물이 그림처럼 흐른 계곡위에는 청류교라고 이름을 지은 출렁 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물이 워낙 맑아 은어가 노는 계곡이라고 했다. 다리 입구에 일본의 어느 시인은 이곳을 보고 일본의 그랜드캐넌이라고 극찬했다는 표지판이 붙어있었는데, 내 눈으로 보아서는 울진의 불영계곡에 비하면 조족지혈 같아서 과장된 표현 같았다.

숲은 울창하여 물소리와 매미 소리는 요란한데 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삼나무 때문이라고 했다. 흔히 삼나무하면 가벼우면서도 곧고 습도에 강하며 잘 휘거나 틀어지지 않아 건축 인테리어, 가구 등에 많이 사용한 고급 나무지만 항균 작용이 뛰어나 병충해가 강해서 벌레가 살수 없다.

그러다보니 먹이가 없는 나무에 산새가 살 리 만무하다. 예술단 일행은 여기서 발목도 담그고 잠시 쉬기로 했다. 내일은 오전에 공연 연습을 해야 하고, 오후는 두 차례의 공연이 있어서 긴장도 풀 겸 휴식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 오후나에의 옛 선착장

오늘 마지막 명소 관광은 오후나에였다. 대마도의 옛 선착장이었다. 조선통신사들도 이곳을 통하여 오고 갔었다. 옛 선착장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었다. 이곳의 안내판도 일본어와 한국어로 표시되어 있고, 음성 시스템의 단추만 누르면 언제든지 한국말을 들을 수 있었다.

하기야 한국 사람들이 매년 10만명 정도나 대마도를 찾는다니 그럴 만도 했다. 한국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이라면 아주 작은 것에도 신경을 쓰고 배려하려는 대마도의 관광 기술은 놀랍기만 했다. 작년 가을에 대마도를 온 적이 있었는데, 대마도 시청 시계가 정오를 알리면서 ‘고향의 봄’ 멜로디가 흘러나와 깜짝 놀랐다.

이런 발상은 기발함을 초월한 걸작 관광 기법일 것이다. 반대로 일본 관광객을 겨냥한 광고 기법이라 할지라도 서울시청 광장에서 정오에 일본 음악이 흘러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있을 수 없는 심판의 민원으로 서울시장은 당장 물러나고 말았을 것이다. 한일간의 역사적 감정과 현실적 이성을 엄격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우리들의 사고가 부족하지 않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일본은 창과 방패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창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세계는 치열하다. 자기 나라의 이익이라면 어제의 적국이 오늘의 맹방국이 되고, 이익과 부합되지 않는다면 오늘의 맹방국도 내일의 소외국으로 팽개쳐버리는 냉혹한 선택의 시대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우리는 가리는 것이 많아 일본을 따라 잡지 못한 것 같았다.

어느덧 땅거미가 지자, 오전에 들었던 대로 정해진 숙소부터 알아 두기로 했다. 대마도 시청 옆 쯔쯔라는 민박집에는 박흥일 단장과 문하생들이 묵기로 했고, 쥬하찌은행(十八銀行) 방향 골목 주택가의 기라쿠나야도(氣樂宿) 민박집에는 나와 구홍덕 박사, 김희준 목포문화방송국 부장, 서영훈 피리 악장, 함태선 선생과 김영준 선생, 여행사 주정훈 소장과 여성 예술단 여섯 명이 묵기로 했다. 기라쿠나야도 민박집은 전형적인 일본식 이층 가옥이었다. 입구 오른쪽 좁은 공간에 신을 모시는 제단도 있었다.

▲ 기라쿠나야 민박집

별도로 현관이 없고 밖에서 출입문을 열자 바둑판만한 마루와 이층으로 올라가는 좁다란 나무 계단이 보였다. 신발을 벗어 놓은 대로 주인아주머니가 가지런히 놓곤 했었다. 난간 손잡이를 꼭 붙잡지 않으면 아래로 곤두박질칠 것만 같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 이층에는 고만고만한 다다미 방 5개가 있었다.

셋은 여성 단원들이 쓰고 둘은 남성들이 쓰기로 했다. 대마도에 여행을 온 것이 아니라 대마도 아리랑 축제에 진도북춤을 공연하러 온 것이니 불편을 타박한다는 것은 이곳에 온 목적에서 크게 벗어난 일이었다.

짐을 풀고 저녁 식사 장소로 갔다. 도심을 흐르는 수로를 따라 이즈하라항 쪽으로 내려가면 낮에 점심 뷔페를 먹었던 금석관 못미처에 <아지트>라는 식당이었다. 한국 여성과 일본 남성이 결혼한 한일 부부가 경영하는 한식식당이었다. 그래서인지 식당 밖 유리에 온통 장독그림을 부쳐 놓은 것 같았다.

쯔쯔 민박집 예술단원들도 떼 지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안 본지 불과 삼십 여분도 채 안되었는데, 쯔쯔 민박집예술단원을 보니 펄쩍 뛸 정도로 반가워 서로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은 벌써 저녁상을 차려 놓고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마도 첫날밤을 기라쿠나야도 민박집에서 보낸 아침이었다. 후텁지근했다. 온 몸이 끈적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어제 밤에 샤워 순서를 기다리다 지쳐서 그냥 잠들고 말았기 때문이다. 샤워실은 하나인데 열여섯 명이 주어진 시간 안에 사용하려니 성질 급한 사람은 숨 넘어 갈 것 같고, 굼뜬 사람은 자기 순서 한번 못 챙길 일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샤워하기는 영 틀린 것 같았다.

▲ 연습중인 박 단장과 단원들

오늘 일정이 만만치 않았다. 오전에는 예술단 전원이 한 곳에 모여 연습을 하고 오후에는 이즈하라항에 마련된 무대에서 두 차례나 공연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는 민박집에서 먹기로 했다. 일본 여행을 몇 차례 했었고 또 작년 가을에 대마도를 와 본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호텔에서 묵었기 때문에 민박집에서 아침 식사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서 몸씨 궁금했다.

대마도는 일본이라 해도 시골이니 어떤 밥상이 차려질까, 반찬은 무엇이며,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는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식탁 방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나의 기대가 컸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식탁 위에 놓인 네모 쟁반이며, 단무지 두 쪽의 작은 접시, 손가락 두 개를 합친 너비의 김 조각, 날달걀 한 개, 연 두부 반 조각, 얇은 연어구이 한 토막, 미소 시루라고 하는 연한 된장국과 쌀밥이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국 한 그릇에 반찬 5개를 1즙(汁) 5채(菜)라고 하는데, 일본을 여행을 올 때마다 흔히 보고 먹었던 낯익은 상차림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삶은 달걀 보다는 날달걀을 즐겨 먹는다. 생선구이는 한국의 김치처럼 매끼 빠지지 않고 나오는데, 주로 연어구이 아니면 고등어구이가 나온다.

식탁에 둘러앉은 일행들은 이런 상차림을 앞에 놓고 자기의 소감을 늘어놓는다. 일본 사람들은 소식하기 때문에 양이 적다느니, 이렇게 먹으니 키가 작다느니, 음식 찌꺼기가 나올 수 없다느니, 먹다가 부족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등 한마디씩 꺼내며 한 점씩 집어서 맛본다. 쟁반 귀퉁이에 엄지손가락만한 열매가 하나 놓여 있는데, 우메차즈케라는 매실절임이다.

일본 사람들은 식사 끝에 후식으로 꼭 먹는다. 매실의 신맛은 소화기관에 영향을 주어 위장, 십이지장 등에서 소화액을 내보내게 하고, 독성물질을 분해하는 효능이 있어서 식중독, 배탈을 막는다. 물이 좋지 않은 일본에서는 식사를 하고 나서는 습관처럼 매실절임 한 개를 꼭 먹는다.

▲ 공연전 한배민속예술단

한국에서 이런 밥상을 차렸다가는 욕만 잔뜩 얻어먹고 딱 망하기 알맞겠지만, 일본은 소식하고 아끼는 습성이니 탓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국그릇이 넘치듯 퍼 담은 얼큰한 된장국이며, 얼굴을 가릴 만큼 큰 접시 위로 수북하게 올려놓은 김치며, 먹든지 말든지 차려 놓은 여러 종류의 젓갈 접시였다.

한 마리는 정이 없다면서 서너 마리 포개서 내 놓은 생선구이며, 뚝배기 가득 부풀어 올랐다가 스르르 꺼지는 달걀 찜, 고추장, 쌈장, 상추, 매운 고추와 맵지 않은 고추, 오이냉국, 손바닥만한 김, 깻잎 절임, 고사리며 도라지나물, 이름도 모른 장아찌 반찬들이 순서 없이 식탁을 가득 채우다 보니 맨 나중에 나오는 밥과 국은 어디다 놓아야 좋을지 난감해진 푸짐한 한국 사람의 식탁에 비하면 일본 사람의 식탁은 초라하게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즈하라항 축제와 태극기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 숙소 예술단원들은 각자 악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태극기를 챙겼다. 예정대로 공연에 앞서 단원 전체가 모여서 연습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도보로 5분 거리인 쥬하찌은행 앞으로 갔다. 대마도에서 약속하기 좋은 장소로는 이즈하라 쇼핑센타와 쥬하찌은행이었다. 그중 쥬하찌은행은 그 표기가 <18은행>이라서 한 눈에 기억되어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곳을 약속 장소로 선호하는 것 같았다.

우리 숙소 일행과 쯔쯔 민박집 예술단원들은 약속된 시간에 만나 버스에 올랐다. 공연 연습장은 버스로 이십 여분 거리에 있는 아오시오노사또 해수욕장이었다. 해수욕장은 너무 조용했다. 한국의 해수욕장 같았으면, 발 딛을 틈도 없이 와글와글 거렸을 터인데, 어른 아이해서 열 명도 밖에 보이지 않았고, 주변은 너무나 깨끗했다.

한쪽 숲이 우거진 곳에는 방갈로가 있었는데 학생인 듯한 청소년들이 캠프 중이었다. 방갈로와 조금 떨어진 반대편에 그늘막 한 채가 있었다. 예술단원들은 폭염의 뙤약볕을 피해 그늘막 안으로 들어가 박 단장이 정해진 위치에 앉았다.

북, 장구, 징은 앉고, 소고잡이들은 뒤에 섰다. 그늘막 밖 앞에는 꽹과리를 잡은 박 단장, 태평소 서영훈 악장, 장구 정진이가 자리를 잡았다. 꽹과리는 가장 작은 타악기지만 소리의 기운이 천둥소리에 비유되어 풍물굿판에서는 사물을 주도하는 지휘자 역할로 상쇠라고 불러왔다.

「자, 주목하세요!」 박 단장이 입을 열자 모두들 바짝 긴장된 얼굴들이었다. 박 단장은 계속해서 「대마도까지 와서 우리 예술단 공연이 잘했다는 말을 들으려면 연습 밖에 없습니다. 오후에 두 차례나 무대에 오르려면 시간이 없으니 오전 중에 열심히 맞춰 봅시다!」

▲ 볼이 터지듯 부는 태평소

모두들 긴장된 가운데서도 「예!」라고 크게 대답하자, 박 단장이 꽹과리를 두드렸다. 이어서 태평소가 삐이이! 하고 가락을 뽑고, 덩달아 단원들의 북이며, 장구며, 중간 중간 징이 울리면서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박 단장이 연습을 정지 시켰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연주 중에 엇나간 단원 몇 명을 지적하면서 장구 치는 몸짓, 북채 잡는 자세를 바로 잡도록 하고 다시 시작하지만 또 얼마가지 않아서 중지시키곤 하는 것이었다.

사실 단원들 중에는 수년 동안 사물악기를 배운 사람들도 있지만, 겨우 몇 달 밖에 배우지 못한 단원도 있는 것 같았다. 금세 땀은 비에 젖는 흥건하기 시작했다. 나는 오후 공연 때 무대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응원할 생각으로 키만한 막대를 구하러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가까스로 낡고 조금 휘어진 대나무 한 개를 주었다.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외국에서 이만한 대나무 막대가 어디 있겠냐 싶어서, 껍질에 묻은 검은 때를 싹싹 문지른 다음에 태극기를 묶으니 그런대로 모양새가 났었다. 이걸 본 단원들이 우우 하고 환호했다. 연습은 몇 번인가를 되풀이하고서야 쉬는 시간을 조금 가졌다.

찐득거린 땀을 씻고, 마른 목을 축이는 동안에도 연습 중에 있었던 잘 못들을 서로 지적하며 고치자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연습은 다시 시작되었다. 목포문화방송국 김희준 부장과 구홍덕 박사와 김영준 선생은 단원들의 연습 모습을 빠뜨리지 않고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연습이 반복되면서 장단 가락이 척척 맞아지자 우리 소리가 저리도 좋은 지 가슴으로 찡하게 느낄 수 있었다. 연습은 한식 식당 아지트에다 주문했던 도시락 배달이 오고서야 끝났다.

「내 맘에는 아직 멀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다면 하는 성질들이 있으니, 연습은 이만하겠습니다.」

모두들 자축과 격려의 박수를 치고 나서야 도시락 한 개씩을 받아 들었다. 도시락을 빨리 비운 사람들은 바닷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하여 마치 바다 거울을 보는 듯 했다. 그늘막 옆 잔디밭에서는 도시락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춤 연습이 한창이었다. 이런 모습이 한국 여성들의 억척스러움인 것 같았다.

우리 예술단의 오후 첫 공연은 5시에 예정되어 있어서, 4시30분까지 이즈하라항 대합실에 모두 집결하였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얼굴 화장과 옷매무새를 정리한 다음 무대 뒤로 자리를 옮겨 대기하였다. 나는 태극기 깃대를 들고 무대 앞 광장 중앙으로 나와 서 있었다. 공연 동안에 태극기를 힘껏 흔들며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 이즈하라항의 진도북채춤

이윽고, 가면 캐릭터 쇼가 끝나자 사회자가 우리 예술단이 소개되었다. 우리 예술단이 무대에 나타나자 박수가 터지기 시작했다. 무대에 앉아서 하는 북장단 공연 순서였다. 자리가 정리되자 박 단장의 꽹과리가 울리고 이서 태평소의 애끓는 소리와 함께 북장단이 덩더덩 덩더꿍 울리고 거기에 경쾌한 장구 소리가 같은 박자로 끼어들고, 중간 중간에 때려주는 징소리의 여운이 한데 어울려 이즈하라항을 온통 들뜨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사물악기는 각각 소리의 특징이 있는데, 이를테면 꽹과리 천지를 흔드는 천둥소리요, 북소리는 구름처럼 둥둥 뜨게 하고, 장구는 마치 세찬 비를 몰고 오는 듯하고, 징은 바람을 가르는 듯하다 소리를 가지고 있다. 거기에 태평소는 애절한 음색으로 아주 길고 멀리 울리는 특징 때문에 흥을 돋우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사물놀이에서 태평소가 있고 없는 차이란 흥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하게 된다.

사물 장단이 침체될만하면 꽹과리 상쇠가 던지는 얼씨구 얼쑤! 한마디 추임새에 힘을 얻어 북이 찢어져도 좋고 장구채가 부러 좋다는 식으로 연주에만 몰입하는데, 이때 구경꾼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어깨를 들썩들썩하기 마련인데, 그 흥에 겨워 죽었던 귀신도 벌떡 일어나 눈을 뜨게 한다는 우리나라의 사물놀이 연주다. 나는 무대의 예술단을 바라보며 행여나 사기라도 떨어질까봐 태극기 깃대를 높이 들어 위로 아래로 흔들며 춤을 추었다.

「워매 태극기도 왔네. 여기서 보니께 겁나게 반갑네. 어디서 왔다요?」 때마침 이곳을 관광 온 일행이 내 곁으로 다가와 묻는 것이었다. 진도북춤공연단이라고 말하자, 「잉, 어쩐지 잘 허구만. 근디 저 아저씨 볼딱지 터지면 어쩔까. 징상스럽게도 불어 재끼네.」

태평소를 부는 서영훈 악장의 터질 듯한 양 볼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연습할 때도 보았지만 태평소 부는 힘이 어찌나 센지 입안에 두꺼비를 몇 마리 넣고 부는 줄 알았었다. 홍색, 청색, 황색 끈을 끝에 매단 북채를 양 손에 쥐고 오른손은 북 아래를 치고, 왼손은 번개보다 더 빠르게 북 양쪽을 오가며 칠 때는 고개까지 신들리듯 흔드는데 저 정도면 지구도 멀미할 지경이었다.

그런가하면 중간 틈에 양쪽을 벌려 덩더덩 가벼운 춤사위를 하다가도 소나기 퍼붓듯 정신없이 북채를 두드려대는 모습이란 한국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재주중에 예술이었다. 북장단 공연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는 사이 관중들의 아쉬운 환호와 함께 끝났다. 그리고 40분 뒤에 진도북춤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 태극기를 든 송명호 상임고문

관중들은 다시 환호했다. 무대 왼쪽의 악사석에서 태평소가 구성지게 터지자 그 흐름에 맞춰 얼씨구 추임새와 함께 깨개갱깽 꽹과리 소리에 맞추어 비녀 머리 한식 무용복에 북을 맨 단원들이 쌍북채로 북 한번 치고서 두 팔을 하늘 로 향해 크게 벌리며 덩실덩실 경쾌한 걸음으로 등장하자 관중석은 흥분의 도가니 속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나도 이때다 싶어 태극기 깃대를 높이 치켜들며 응원하기 시작했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제 18호로 지정된 진도북춤은 쌍북채를 이용하여 사물악기에 맞추어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가락을 타면서 큰 손짓과 박진감 넘치는 몸짓으로 북가락이 갖는 시간적 소리와 율동이 갖는 공간적 조화가 무대를 통째로 뜨겁게 하는 흥겨운 춤판이다. 살풀이 같은 마당에 치마 밑으로 슬쩍슬쩍 비치는 버선발 까치새 발사위를 보고 안 미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저게 북춤인교? 나는 첨 보는데 환장하겠심더.」 「거 보소. 잘 왔제?」 아마도 이즈하라항 축제를 보자고 제안했던 부산 관광객의 말이었다.

사실 나도 진도북춤을 실제로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북 등의 화려한 무궁화 그림에 쌍북채로 양북을 치며, 발로는 땅을 다지고, 양 팔로는 열고, 또한 경쾌한 몸짓으로 세상을 아우르려는 천진난만한 끼는 한국 사람만이 다스릴 수 있는 예술이었다. 저런 춤을 보면서 자칫 정신을 놓으면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오줌마저 질금질금 흘리고 말 것이다.

속이 후련하도록 무대를 한바탕 종횡무진하던 진도북춤은 모든 관중들의 혼을 쏘옥 빼 놓고서야 막을 내렸다. 그렇게도 푹푹 찌던 대마도의 폭염도 진도북춤의 신명났던 여운과 함께 서서히 노을의 휘장을 닫고 있었다.

오늘은 대마도 이즈하라항 아리랑축제의 마지막 날이다. 행사의 클라이맥스나 다름없는 401회 조선통신사행렬이 오후 3시에 진행되고 오후 늦게는 우리 한배민속예술단의 진도북춤 공연이 있는 날이다. 이런 긴장 때문에 다른 날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한방지기 구홍덕 박사와 여수시립국악단 서영훈 악장의 단잠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조심해서 방문을 빠져 나왔다.

아래층 현관을 나오니 후덥지근한 공기와 함께 온통 매미 소리와 까마귀 소리가 귀를 찢는다. 매미 소리야 여름이니 요란하게 들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아침 새소리에 익숙한 한국 사람으로서는 눈곱도 떼기 전에 귀를 후비는 까마귀 소리가 낯설고 기분마저 썩 좋지 않아 역시 이국이구나를 실감케 했다.

한국이 비둘기 낙원이라면 일본은 까마귀 천국인 듯 했다. 아침 여덟시에 식사하려면 앞으로도 한 시간 반이나 남아서 기라쿠나야도(氣樂宿) 숙소를 나와 골목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카라이 토스이(半井桃水館) 기념관 대문을 지나 위쪽으로 슬슬 거슬러 걸어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골목에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서 이 시간이면 우유며 야구루트며 신문 배달이며 일터를 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부산하는데, 아직도 밤의 적막이 이어지고 있는 듯 했다. 골목길은 손바닥으로 쓱 닦아도 먼지 한점 묻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여 이것 역시 낯설고 오히려 걷기가 거북스러울 지경이었다. 일본을 올 때 마다 느낀 점은 먼지가 없고 거리가 깨끗함이었다.

▲ 검은고양이 간판

골목 돌담에 작은 담쟁이 넝쿨이며 콩짜개란 줄기가 빼곡하게 자라 있어서 삭막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해풍이 대마도 전체가 드나드는 곳이라서 이런 넝쿨 식물들이 잘 자라는 듯 했다. 골목이 끝나자 엷은 바다 비린내가 풍기는 수로가 나왔다.

이즈하라항으로 이어지는 바닷물 수로이다. 이즈하라항 쪽 보다는 깨끗했다. 아마도 이쪽은 여행객들의 발길이 많지 않은 주택가라서 그런 것 같았다. 수면을 건드리며 줄을 잇는 물 파동은 바닷고기들의 행차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한참 들여다보니 물고기와 인간이 마치 동병상린의 운명처럼 보인다.

물고기는 물에만 붙어살고, 인간은 땅에만 붙어사는 꼴이 그러했다. 지금 귀를 찢는 매미와 까마귀는 다리와 날개가 있어서, 땅위를 걷기도 하고 하늘을 날기도 하지 않은가. 이 수로부터는 길이 넓어져 택시들이 가끔씩 지나간다. 주변은 크게 볼만한 것이 없어 보여 길거리에 세워진 안내판만 살펴보았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대마도 소방본부가 나오고,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육상자위대가 나오는 것 같았다.

길 양쪽에는 아리랑축제의 깃발들이 도열하듯 꽂혀 있었다. 다시 되돌아오는 골목길 전봇대에 칭칭 감기듯 세워진 검은고양이 간판이 눈에 들어와 가까이서 보았더니 택배 상호를 알리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강아지 보다는 검은 고양이가 더 애완동물인 것 같다.

하늘 색깔이 어두워진다. 얼굴에 웬 물방울 기운이 느껴진다. 발걸음을 서둘러 숙소로 돌아오니 빗방울이 우두둑 떨어진다. 바람까지 불면서 비가 퍼붓는다. 오후에 커다란 행사를 두고 비가오니 걱정이 되었다.

내가 산책을 하는 사이 나머지 사람들은 세수며 샤워를 다 마친 상태여서, 여유 있게 머리도 감고 몸에 비누질도 했다. 「미나상! 아사 고항! 모닝 고항!」 아침 식사 준비가 다 됐다는 주인아주머니의 간드러진 음성이 온 집안을 잔잔하게 울린다.

▲ 고깔을 만드는 예술단원들

「오하요 고자이마스」 일본 여행중 빼 놓을 수 없는 일본식 아침 인사말이다. 아래층의 식탁 방으로 들어온 우리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주인아주머니한테 일본식 인사말을 건넨다.

어제 아침부터 웬 젊은 여자가 주인아주머니를 돕고 있어서 궁금하여 물어 보았다. 일본어가 여물지 못해 주정훈 여행사 소장에게 통역을 부탁하였더니, 주인아주머니의 딸로서 결혼 한지 4년 8개월 되었고, 아들 둘과 딸 둘을 낳은 영어 선생님이라고 했다. 나이는 고작 스물여덟이라는데 결혼 4년 8개월 만에 아이 넷을 낳았다는 말에 모두들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그 나이에 아이 넷을 낳은 일은 놀라운 일도 아닌데, 놀랍다는 표정을 짓는 것이 더 이상하기만 했다. 나도 형제가 9남매 아닌가. 한때 한국의 경제가 어렵다보니 인구 억제 정책으로 한 부부 두 자녀를 권장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자녀 출산을 적극 장려하고 있어도, 그게 쉽지 않아 오히려 국가의 고민이 되고 있는 것이 한국이 실정이다.

아침 식사를 하는 동안 비는 그쳤다. 후덥지근하던 날씨가 다소 서늘해졌다. 식사를 마친 예술단원들은 오후에 있을 행사 준비로 의상을 다듬거나 각자의 악기를 손질하였다. 나는 태극기 깃대를 손질하기로 했다. 어제 예술단원들이 연습을 하던 해수욕장에서 주운 낡은 대나무로 만든 깃대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새로 만들기로 하고, 주정훈 소장에게 깃대로 쓸 만한 재료를 구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더니 숙소 주인에게 한번 여쭤볼테니 다른 볼 일이 있으면 그 일부터 먼저 하라고 한다.

주정훈 소장의 친절한 배려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숙소 건너편의 나카라이 토스이 기념관이나 구경하기로 했다. 관람은 자유였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오른쪽에 토스이를 소개한 안내판이 일본어, 영어, 한국어로 적혀 있었다.

토스이는 1860년에 대마도에서 태어난 아버지를 따라 부산 왜관에서 잠시 생활한 바 있었고, 16세 때 영문학을 배웠다. 1882년 무렵에는 서울에 있었는데 마침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이런 현지 사건을 맨 먼저 보도하였고, 이를 계기로 도쿄 아사히신문사에 입사를 했다. 그 후 아사히신문에 시대물과 현대 소설을 자주 발표하여 독자들을 매료시키게 되었다.

▲ 조선통신사 행렬도

이런 인기로 여자 소설지망가 20세 이치요는 토스이를 만나게 되고, 그 후 25년 동안을 흠모하다가 죽었는데, 이런 사실들은 그녀가 생전에 꼬박꼬박 적었던 일기에서 밝혀지게 되었다. 가슴 뭉클한 비련의 로맨스였던 것 같았다. 마루 안으로 들어서니 왼쪽의 조그만 유품 방에 나카라이의 사진과 이치요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층은 토스이가 썼던 소설과 그의 문학적 업적을 소개한 각종 서적들이 책꽂이에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토스이 기념관을 관람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주정훈 소장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색을 하며, 조금 전에 부탁했던 태극기 깃대를 잘 만들어 놨다고 한다. 숙소 주인이 주정훈 소장의 부탁을 받고, 이웃집에 가서 곧고 초록빛 진한 대나무를 얻어와 적당한 길이로 톱질을 해서 태극기 위치대로 단단히 묶어 놓았노라고 경위를 자세히 말해 준다. 아니다 다를까 아주 멋진 태극기 깃대였다. 오후에 행사 때 이렇게 멋진 태극기 깃대를 들고 우리 예술단 선두에서 길잡이를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초등학교 때 태극기를 달으라고 하면 대나무 꼭대기에다 노끈으로 묶어서 대문 밖에 세워 두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광복 이후 국기에 관한 규정을 보면 그 무렵 마땅히 게양대 재질이 없어서 대나무에 국기를 게양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외국 여행을 몇 차례 다녔지만 그때마다 태극기 몇 장씩을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교포들에게 또는 호텔에 선물하곤 했었다. 내가 태극기를 선물하게 되면 우리 교포들은 혈육을 만난 것보다도 반가워하면서 사실 태극기를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들을 하나같이 털어 놓는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여행객들의 발길이 많은 외국 호텔과 음식점에서는 태극기 한 장 걸어 놓기를 바란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애국정신이 강하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국내에 있을 때는 잘 모르지만 외국에 온 한국 사람들이라면 문득 발견한 태극기만 보아도 눈물까지 글썽이곤 한다.

내가 태극기 마니아의 길을 걷게 된 때가 1978년의 일이니까 30년째이다. 그 무렵 나는 동사무소에 근무를 했었다. 동사무소는 동네 중간쯤에 이층 목조 건물이었고, 현관 바로 앞에 국기 게양대가 있었는데, 이곳은 항상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하루는 아이들이 목청을 높여 떠들고 있어서 싸운 줄 알고 나가 봤더니, 어떤 아이가 다짜고짜로 태극기를 누가 만들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수신사 박영효가 만들었다고 하니까, 다른 아이가 나서면서 그 증거가 있느냐고 반문을 한다. 아마도 아이들은 태극기를 최초로 누가 만들었을 가를 놓고 갑론을박한 것 같았다.

▲ 수로의 다리난간 조선통신사 삽화

나는 순간 중대한 실수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최초의 태극기를 박영효가 만들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만들었을까? 박영효가 만들었다면 그 태극기를 본 적이 있는가? 아니, 본 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최초의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찾아봐야 할 게 아닌가? 이런 자극 때문에 태극기 연구에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일요일이면 도서관과 고서점이 즐비한 청계천을 뒤집듯 드나들면서 최초의 태극기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으나 티끌만한 흔적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런 핑계로 태극문양이 있다는 말만 들어도 발품을 벌어서 꼭 가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곤 했었다. 그런 덕분에 회암사 터의 계단 태극문양이며, 궁궐의 정전과 침전이며, 종묘, 왕릉의 정자각 동쪽 어깨 돌에도 태극문양이 새겨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태극문양들은 먼 훗날 태극기가 만들질 때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증거가 되기도 하였다.

나의 지독한 끈질김은 결국 1997년 8월에 이르러서야 도쿄 도립중앙도서관에서 1882년 박영효 수신사 일행이 일본을 방문하면서 태극기를 가져와 고베 니시무라야 숙소 옥상에 게양했다는 1882년 10월 2일자 시사신보의 기사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최초의 태극기는 고종 임금이 태극문양에 4괘를 넣고 색깔은 청색과 홍색으로 하되 4괘의 의미는 방향이라고 했다. 고종 임금이 국기의 필요성을 느끼자 중국은 마건충이라는 신하를 보내 당시 조선왕국은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으니 중국의 왕기인 용기를 본받아 그리되 색깔만 청색으로 쓰도록 간섭을 하였으나, 고종 임금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태극기를 그려서 국기로 사용하게 되었노라는 경위까지 설명되어 있었다.

그러니 최초의 태극기는 박영효가 만든 것이 아니라, 고종 임금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태극기가 만들어진지 115년 만에 그 진실이 밝혀지자 KBS는 8월 14일 밤 9시 뉴스에 특종으로, 동아일보와 한국일보는 그 다음날 특종으로 보도를 하게 되었고, 그 밖에 언론들도 다투어 최초의 태극기 자료 발굴 기사를 싣게 되자, 이날부터 나는 일약 태극기박사로 호칭을 받았다.

올해는 광복 60주년으로 태극기의 의미가 남다르다. 작년부터 문화재청에서 추진한 국가상징물 문화재등록 사업에 내가 조사위원으로 활동하여 옛 태극기 15점을 근대문화재로 지정한 것도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 민박집 주인과 딸

일본에서 새로 만든 깃대를 보며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태극기의 추억을 더듬는 동안 주정훈 소장이 숙소의 일행들을 모아 우리 방으로 온다. 오늘 일정을 다시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오후 3시 조선통신사행렬과 6시 반에 있을 북춤놀이가 빠듯하니, 금석관 호텔에서 점심을 서둘러 마치고 2시에는 의상과 악기를 챙겨 숙소를 나서서 쯔쯔 숙소에 묵고 있는 예술단과 합류하여, 행렬 출발지 이씨왕가 유적지로 가야하는데 차질이 없도록 행동을 맞추어 달라고 당부한다.

오후에 있을 대마도에서 조선통신사 행렬, 그리고 매년 재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은 일본 행사라기보다는 한국 행사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배경을 거슬러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때는 마침 1404년(태종 4), 조선왕국과 일본 사이에 교린관계가 맺어졌다. 이를 계기로 조선국왕과 일본의 막부장군은 양국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외교적인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때 조선국왕이 막부장군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통신사라고 했고, 막부장군이 조선국왕에게 파견하는 사절을 가리켜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이라는 의미는 서로 신의(信義)를 통하여 교류한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사절단 이름을 조선통신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보빙사(報聘使)ㆍ회례사(回禮使) ㆍ회례관(回禮官)ㆍ통신관(通信官)ㆍ경차관(敬差官) 등 다양하였다.

조선통신사의 명칭이 처음 쓰인 것은 1429년(세종 11) 교토에 파견된 정사 박서생(朴瑞生)을 파견할 때부터였다. 조선통신사 파견을 통해 왜구 금지요청, 일본국정의 탐색, 막부장군의 습직(襲職) 등을 축하했다.

▲ 한국인 출입금지 안내문

세종대왕 때에는 이종무가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의 토벌로 노략질이 어렵게 되자 왜구는 조선에 교역을 요청하였고 조선은 일본의 간청으로 3개의 항구를 개항하여 식량과 옷감, 구리 등으로 바꾸어 주는 등 선린의 배려를 베풀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양국 국교가 단절되었으나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게 되자, 그 후 일본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의 침략을 깊이 반성하고 두 나라 사이의 우호관계를 회복하고자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임진왜란 때에 끌려간 사람들을 구하기도 하였고, 양국간에 신뢰를 다지고 또 조선의 발달된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수하기도 하였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방문 목적의 따라 300~500명에 달했으며, 정사, 부사, 종사관, 통역, 군관, 병사, 의원, 화가, 인쇄공, 악공, 뱃사공 등으로 구성되어 학문, 기술, 예술 분야에 뛰어난 사람들을 선발하여 파견하였다.

여정은 한양을 출발하여 부산에서 배를 타고 대마도주의 안내를 받아 이즈하라를 거쳐 시모노세키(下關)를 통과하여 오사카의 요도우라(淀浦), 육로로 교토로 갔다가 도쿄에 도착하여 조선왕국의 국서를 전달하였는데 그 기간은 6개월에서 1년이 걸리기도 하였고, 통과 지역마다 조선통신사를 맞이하는 접대 예의가 너무나 화려하고 장엄하여 그 경비가 엄청나서 1711년 아라리 하구세키는 통신사 접대에 관한 규정을 바꾸기도 하였으나 1719년에는 다시 환원되었다.

이런 통신사의 파견에도 불구하고 1592년부터 7년간에 걸친 히데요시(秀吉) 침략의 임진ㆍ정유왜란은, 일본군에 의해 대살육이 일어나, 방화, 약탈, 기아, 연행 등의 참상을 빚기도 하였다. 어쨌든 예전에는 조선이 일본보다 사회 문화적으로 우위였지만 19세기 중반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면서 급격한 근대화 국가로 발전하게 되었고, 현재는 세계 경제 강국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역사적 근거로 대마도에서는 이즈하라항 아리랑 축제와 함께 올해는 401회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를 해마다 열고 있다. 당초에는 ‘이즈하라항 축제’였으나 한일 민간교류를 더 활성화하기 위해 이곳 향토학자의 제의로 ‘아리랑’이란 단어를 추가하여 ‘이즈하라항 아리랑 축제’로 명명했다고 한다.

▲ 조선통신사 정사 행렬

도심을 길게 흐르는 수로의 다리 난간에 조선통신사의 삽화로 장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마도는 확실히 조선통신사의 섬임에는 틀림없었다.

이번 행사에 참가한 나로서는 만감이 교차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교과서에 독도의 영토를 일본이라고 주장한 단서로 한일 양국이 팽팽하게 냉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마도의 일상은 독도 문제와는 별게라는 듯 축제에만 열중한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한국 정서로는 행사를 당장 취소할 법한데 의외로 거리마다 온통 축제 플래카드가 나부끼고 있어서 더욱 그러했다. 이런 대마도의 현지 사정을 지켜 본 한국 사람의 일부에서는 속셈을 감춘 일본 사람의 근성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일부에서는 돈이라면 쓸개까지 빼주는 일본 사람의 경제 근성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유야 어쨌든 나의 견해로는 냄비처럼 금방 뜨거웠다가 얼음보다 더 차가워지는 한국 사람들보다는 지진과 파도에 단련된 일본 사람들이 더 차분하고 냉정한 것 같았다.

우리 숙소의 일행은 발길을 재촉하여 점심시간이 예약된 금석관으로 향했다. 아침에 비가 온 탓인지 날씨가 조금 서늘해졌다. 다행스러웠다. 어제와 같은 뙤약볕이라면 오늘 행사가 난감했을 것이다. 금석관 가는 길에 주점인 듯한 벽에서 이상한 표지판을 보았다.

여행을 온 한국 사람이 이곳에서 큰 행패를 부린 듯 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은 출입을 삼가달라는 경고 표지판이었다. 창피하고 분했다. 우리는 한일 관계의 역사적 감정으로 일본을 이겨야 한다고 떼를 지어 팔팔 뛴다. 하지만 팔팔 뛰어서 이길 일은 아니다. 우리가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전쟁이 아니라, 수준 높은 문화의식이다. 일본 사람 보다 더 친절해야하고, 일본의 거리보다 더 깨끗해야 하고, 일본 보다 더 한수 위인 관광 마케팅이 있어야 한다.

▲ 조선통신사 정부사 소개

그러나 우리나라 어느 도시를 가든지 일본만 하는가. 밤새 흥청망청 마시고 이성을 잃어버린 흔적들을 길바닥에 남겨 놓으려는 듯 여기 저기 전 부치듯 토해 놓고, 또 얌체처럼 버린 쓰레기들로 마치 태풍이 스쳐간 험상궂은 형국으로 과연 일본을 이길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산하처럼 아름다운 곳은 없다. 서울과 수도권만 벗어나면 땅도 넓고 관광지로 개발할만한 곳도 너무 많다. 그중에 제주도는 천혜의 비경이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일본 관광객을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다. 한번 온 일본 관광객이 두 번 다시 오겠느냐면서 불친절은 말 할 것도 없고 음식값이며 관광 상품에 바가지를 몽땅 씌운다니 누가 제주도 관광을 오겠는가. 비단 제주도 뿐만은 아니다. 전국 도처가 그런 실정이라는 것을 결코 부인하고 싶지 않다.

대마도나 일본을 관광 온 한국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구동성으로, 거리가 너무 깨끗하고, 사람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깔끔하고, 항상 ‘쓰미마셍(미안 합니다)’을 입에 달고 다닌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걸 느끼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돌아와서는 언제 그런 것을 보고 느꼈느냔 식으로 까맣게 잊어버리니 비싼 돈 들여서 일본을 관광한 보람은 한낱 낭비로 그치고 만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찌 일본을 이기겠다고 덤비는지 한숨만 터진다. 이런 저런 착잡한 생각을 하다 보니 점심 생각조차 내키지 않아 대충 때우고 금석관을 나왔다. 수로길 양쪽 골목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이 둘 셋 어울려 나와 어디론가 가고 있다. 오후에 있을 조선통신사행렬 행사 요원 같다. 책에서만 읽어 왔던 조선통신사 행렬을 이번에 비로소 내가 직접 대마도 현지에서 참여한다니 그 웅장함을 서둘러 보고 싶어진다.

숙소는 어느새 점심을 마치고 돌아온 예술단원의 움직임으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화장을 하는 사람, 북이며 장구를 챙기는 사람, 몸에 걸친 북춤 의상을 제대로 입었는지 살펴봐달라는 사람, 맨 머리에 고깔을 쓰면 흔들거리니 이마에 수건을 동여매고 그 위에 쓰라는 등 어수선할 정도였다. 우리 민속예술단 선두에서 태극기를 들고 길잡이로 나설 나도 고깔을 써야 한다기에 하나 챙겼다. 이때 여행사 주소장과 함께 내 방으로 들어온 주인아저씨한테 정중히 인사를 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태극기 깃대를 손수 만들어 주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만나서라도 답례를 하려고 했었는데 마침 내 방까지 찾아 왔으니 기회는 이때다 싶어 인사를 한 것이었다.

▲ 선두 기수 태극기

주인아저씨가 뭐라고 하는데 일본어가 여물지 못한 내가 어색해하자 이를 알아차린 주소장이 나서서 자상하게 통역을 해주었다. 아마 오늘 조선통신사 행렬 때 태극기를 높이 들고 흥겹게 걸어가면 대마도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 할 것이라면서 그런 깃대를 손수 만들게 되어 자랑스럽다는 주인아저씨의 말이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고마워서 다시 한 번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로 마무리 답례를 했다.

오후 세시에 시작되는 조선통신사행렬 재현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두시 반쯤에 숙소를 떠나 쯔쯔 민박집의 예술단과 대마도 시청 앞에서 만나야 했다. 다행히 날씨는 아침에 비가 내려 어제 보다는 훨씬 서늘한 기운이었다. 나는 태극기 깃대를 들고 앞장섰다. 골목을 벗어나 하찌만구(八幡宮) 신사의 큰 거리로 나오자 벌써부터 경찰관들이 교통을 정리하느라고 부산하였고, 이즈하라 쇼핑센터의 만남의 광장에는 구경꾼들로 꽉 차 있었다. 태극기 깃대를 든 나와 예술단원들을 보고 박수를 치는 사람들은 조금 있으면 이곳을 지나갈 조선통신사행렬 재현 행사를 보러 온 한국의 관광객들이었다.

대마도 시청 현관에는 왼쪽에 태극기와 오른쪽에 일본기가 꽂혀 있었다. 쯔쯔 민박집 예술단원과 만나 대마도 시청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조선통신사행렬 재현 행사 출발 장소인 이씨왕조가 유적지로 향했다. 입구 큰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오늘 행사를 선도할 군악대 뒤로 정사, 부사, 종사관의 가마를 비롯해서 학사, 상관, 훈도, 포수, 순시기수, 영기수, 청도기수, 마상고수, 세악수, 풍악수 등 순서대로 대기하고 있었다.

우리 예술단원은 행렬의 대미를 장식할 굿거리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맨 뒤로 갔다. 박단장이 행사 시작에 앞서 몇 가지 사항을 당부했다. 「우리는 맨 앞에 태극기 기수가 가고, 그 다음에 구홍덕 박사님과 김영준 선생님은 진도북춤기를 들고 따라 가시고요, 상쇠 내 뒤로는 연습 때 말씀드린 순서대로 따라오면 됩니다. 그리고 제발 웃으세요. 다 아셨죠?」 「네에!」

예술단원들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고깔을 단단히 묶고 연습 한번 하자는 박 단장의 제의에 기다렸다는 듯이 북치고 장구를 친다. 어느새 박 단장의 꽹과리에 맞춰 한바탕 굿거리 판이 신명나게 벌어지는 것이었다.

이윽고, 군악대의 군악이 울렸다. 대장정의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가 시작 되었다. 책에서만 읽었던 조선통신사 행렬에 구경만 해도 큰 자랑거리인데, 직접 참여하다니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교과서에다 천명한 중대한 사건으로 한일 감정이 미묘한 시기에 내가 태극기를 들고 이 행사에 참여하여 일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마도 시가지를 당당히 걷게 되었다는 것은 한국 사람의 자긍심이라고 생각했다.

▲ 한배민속예술단 공연행렬 취재모습

거리의 구경꾼들 중에는 태극기를 보면서 손을 흔들기도 하고,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내밀며 최고라는 표시도 보여 주었다. 내 앞에서 일본 엔에치케이(NHK) 텔레비전 카메라가 한 동안 태극기를 촬영하기도 했다.

뒤에 들은 이야기인데 조선통신사행렬 재현 행사에서 태극기가 나타난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했다. 대마도 시청을 지나서부터는 언론사 취재가 부쩍 늘어 진행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럴 때 마다 구경꾼들에게 볼만한 것은 우리 예술단의 굿거리였다.

대마도를 진동시키는 태평소 소리 아래로 원색의 고깔을 쓴 예술단원들이 각자의 북 장단에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한 발짝 나서다가 멈추듯 무릎 박자로 뒤로 조금 물러서기도 하고, 쌍북채 손에 들고 어깨를 들썩들썩 흥을 돋우며 생긋생긋 웃는 모습이야말로 천상에서 내려온 축제의 천사 같았다. 내 뒤에서 진도북춤기를 든 구홍덕 박사는 본디 낙천적인 기질로 포수 행세를 하면서 온갖 재주를 부려 구경꾼들에게 박수를 받곤 했었다.

행렬은 하찌만구 신사 네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곧 수로 길을 따라 이즈하라항쪽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구경꾼들 속에는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도 있었는데 우리 예술단이 지나갈 때까지 꼼짝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대마도에서 조선통신사행렬 재현 행사란 전통의 맥이자 자랑거리였다.

이런 큰 행사가 있는데도 거리며 골목에는 노점상이나 잡상인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이즈하라 전체가 깨끗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사람이 조금 모일 기미만 보이면 맨 먼저 눈에 띠는 것은 잡상인과 노점상이 아니던가. 아마 한국에서 이런 정도의 행사가 있다면 노점상과 잡상인으로 그 지역은 무질서와 쓰레기로 초토화가 되고, 각종 사건 사고로 얼룩지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 비교를 해보니 태극기를 들고 이즈하라 시내를 걷고 있는 나 자신이 위축되기도 하였다.

일본 사람은 최고의 덕목은 애국과 준법정신이다. 개인은 희생되어도 나라는 잘 살아 남아야 한다는 정신인 것 같다. 그래서 일본 사람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가미가제 정신과 사무라이 정신을 언제 어디서든지 발휘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 또 일본 사람은 남에게 피해 끼치는 일을 금기시하여 항상 쓰미마셍(미안 합니다)이라는 말을 생활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이다.

▲ 공연장면 TV 방영

일본 사람이 가장 무서워한 것은 아버지, 지진, 불이라고 한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모범되지 못하면 자식이 흐트러지고, 아버지가 애국심과 예절을 제대로 전해주지 않으면 가정과 이웃 사회가 망한다는 뿌리 깊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란 곧 최고의 존경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 사람은 천황, 조직의 대장(오야봉)에 대한 충성심은 목숨과도 바꾼다. 그런 정신이 오늘의 일본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일본을 뛰어 넘으려면 반일 감정도 아니고, 경제력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을 능가하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문화의 힘이다. 요즘 위아래도 없고, 정체성이 혼란스럽다고 하는데, 곧 우리의 전통 문화가 붕괴 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어려우면 뭉치고, 쓰러뜨려도 일어난다는 정신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를 얕잡아 보는 것은 뜨겁게 달구었다가 얼음처럼 시들어버리고, 셋만 모이면 편을 가른다는 속성이다. 따지고 보면 독도 문제도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저지른 속셈일지도 모른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착잡하기만 했다. 우리 예술단이 일본의 언론과 구경꾼들의 이목을 받으면서 이즈하라항 무대에 도착하였을 때는 조선국왕의 국서를 전달할 한국으로부터 임명받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을 소개하고 있었다.

약 2.5km의 거리에서 재현된 401회 조선통신사행렬은 여기서 끝났다. 우리 예술단은 오후 늦은 시간 6시 45분에 어제 이 무대에서 선 보였던 진도북춤을 한차례 가졌다. 이 시간에도 태극기 깃발은 빠지지 않고 나타나 응원하여 공연의 힘을 불어 넣어 주었다. 태극기는 국가를 상징하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힘을 주는 정신적 에너지이다. 그런데 남북 행사 때 한반도기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한반도기는 국기가 아니다. 자칫하면 태극기에 대한 정체성을 흐리게 할 빌미가 된다. 무엇이 두려운지 북한 땅에 태극기가 나타나면 안 되고, 남한 땅에 북한기가 나타나면 안 되니 대신에 한반도기를 사용하자는 것은 미래를 어둡게 하는 것 밖에 안 된다. 가까운 현미경 보다는 멀리 보는 망원경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진도북춤 공연이 끝나자 아사히 텔레비전 카메라가 다가오더니 인터뷰를 요청했다. 이번 이즈하라항 대마도 아리랑 축제에 태극기를 보니 특별한 느낌이 든다면서 이 행사에 참가하게 된 소감을 물었다. 나는 조선통신사행렬 재현 행사는 이즈하라항 축제이면서도 한일간 좋은 문화교류로써 세계적인 볼거리이니 더 좋게 발전시키고 계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올 대마도 아리랑 축제는 밤 9시 불꽃놀이로 마무리 되었다.

다음날 민박집에서 아침 뉴스로 엔에치케이(NHK) 텔레비전을 보니 독도를 일본 교과서에 표기한 것에 대하여 한국이 크게 반발하여 조선통신사행렬 재현 행사에 민간사절단을 축소하여 파견한 것을 보도하고 있었다.

한일간의 역사는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한 영원히 존재한다. 우리민족처럼 끈질기고 생명력이 강한 민족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일간의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본이 우리 민족을 얕잡아 보는 단점을 없애는 일이다. 그리고 일본을 보는 시각은 현미경속의 티끌이 아니라 망원경속의 미래라야 한다.

내가 행사 기간 동안에 받들고 다녔던 태극기는 마지막 날 아즈하라항을 떠나면서 아지트 식당에 선물하였다. 이번 조선통신사행렬 재현 행사에 참여하면서 나의 진실한 소감은 진도북춤과 함께 아리랑 아리랑 대마도 태극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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