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12 노계 박인로와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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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12 노계 박인로와 유적
  • 이원석 기자
  • 승인 2020.11.19 13: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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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 노계문학관, 묘소, 사당, 노계곡, 용진사제, 입암
‘노계 박인로의 가사문학사적 공적과 위상’ 학술대회도 개최

영천시의 후원을 받아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제언어문학회가 주관한 ‘노계 박인로의 가사문학사적 공적과 위상’을 주제로 한 2020년 정기학술대회와 노계유적지 답사가 지난 13, 14일 이틀간 노계문학관에서 진행됐다.

학술대회에서는 ‘노계 선생의 가계와 문학적 업적’(박영환 노계박인로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노계 박인로 가사의 심상공간과 그 의미 지향’(이형대 고려대 교수), ‘노계 박인로의 가사연구 경향과 연구사의 쟁점’(박수밀 한양대 교수), ‘영남지역 가사문학의 위상과 현대화의 과제’(류해춘 성결대 교수) 및 종합토론이 이루어졌다.

둘째 날 유적지 답사에서는 전날 서원 및 묘소 참배에 이어 만년에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지금의 국민청소년수련마을 인근에 위치한 노주(蘆洲)의 자연을 사랑해 집을 지어 지냈던 노계곡을 답사했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사인으로 추앙받는 노계 박인로의 유적을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 도계서원

선생 사후 65년이 지난 1707년 선생을 숭모하는 유생들이 뜻을 모아 도계(道溪)의 한 언덕인 괴화(槐花)마을 동북쪽 언덕으로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풍덕산 중턱에 사우(祠宇) 세 칸을 지어 신주를 봉안하고 ‘도계사(道溪祠)’를 창건했다.

이후 도계사(道溪祀)는 선생의 사상과 학문을 흠모해 제향을 이어온 지 161년 만인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70년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선생의 묘소 인근인 현 위치에 복설(復設)해 도계서원(道溪書院)이라 현액하고 향사를 받들고 있다.

◆ 박인로 묘소

묘지 한가운데가 선생의 묘소이고 아버지 박석(朴碩)의 묘가 바로 위에 있다. 동생 인수(仁叟)의 묘는 왼쪽으로 떨어져 있고 동생 인기(仁耆)의 묘가 바로 아래에 있다. 맨 아래 묘는 인수의 아들 순립(舜立)의 묘이다.

선생은 부모가 돌아가신 후 해마다 이곳에 성묘하러 왔으며 그때의 감정을 “어버이 그리는 정 늙을수록 더욱 깊어/하늘이 다하고 땅이 없어야 내 마음 다하리/개오동나무에 이슬과 서리 내리면 더욱 그리워져/해마다 성묘 때면 눈물 글렁이네(永慕情瀤老益深/窮天無地盡吾心/楸原霜露偏增感/省掃年年㴃不禁)”라고 읊조렸다.

선생은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너무나 지극해, 살아 계실 때에는 지성껏 봉양했고, 돌아가신 후에는 3년 동안 여막(廬幕) 생활로 예를 다했다. 그의 효심은 ‘오륜가(五倫歌)’와 ‘조홍시가(早紅柿歌)’에 잘 나타나 있다.

◆ 노계문학관

영천시에서 노계 박인로 선생의 충효사상과 문학세계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문화·관광을 자원화하기 위해 2018년 6월 이곳에 노계문학관을 조성했다.

노계 박인로 선생의 생애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조성한 전시실과 60여 명이 수용 가능한 영상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천의 3선현 중 한분인 노계 선생의 문학정신과 성경충효 사상을 배워볼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으며 노계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도계서원 옆에 위치하고 있다.

◆ 노계사당(蘆溪祠堂)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383에 위치한 노계사당은 1770년경 도계 서원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서원 철폐령으로 폐철되었다가 사당만 남아있던 것을 1880년경 현 위치에 이건한 것이다.

사당 건물 1동과 일각문(一脚門, 기둥을 2개만 두어 간단한 출입문으로 사용하거나, 궁전·양반집에서 협문으로 사용하는 작은 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방형의 토석 담장을 둘러 일곽을 이루고 있다. 사당은 평면이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사당 전후로 넓은 외벌대 기단(집이 있는 부분을 주위보다 한층 높게 쌓은 것)을 마련한 다음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올린 형태이다.

노계사당은 이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 관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퇴락이 진행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 노계곡

노계 선생 76세 때, 지금의 경주 산내 노계곡의 산수를 찾아 자연을 벗삼아 여생을 보내면서 ‘노계가’를 쓴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이다. 국민청소년수련마을 안에는 영천향토사연구회에서 건립한 ‘노계박인로유적지’비가 세워져 있다.

노계가의 서두는 늙은 몸이 되어 평생소원이던 산수를 찾아드는 감회로 시작된다. 이어서 노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고 그 속에서 자연을 즐기는 삶의 흥취와 의미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는 강호 자연에 묻혀 태평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것은 모두가 성은(聖恩) 때문이라는 것과 우국일념을 잊지 않는 충정을 말했다.

국문학자들은 노계가에 대해 언어의 단청으로 아름답게 그려놓은 걸출한 풍경화 같다고 평하기도 했다.

◆ 한음 이덕형의 용진사제(龍津莎堤)

1611년 한음 이덕형이 벼슬을 그만두고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인 용진(龍津) 사제(莎堤)에 있을 때 그곳을 찾아가 그를 위해 가사 ‘사제곡(莎堤曲)’을 지으니 용진강 사제의 아름다운 경치와 그 가운데 한가롭게 살아가는 이덕형의 생활을 노래한 작품이다. 뒤에는 운길산, 앞에는 북한강이 흐르고 있어 서울사람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가 되어 있었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려는 부자들의 고급별장이 주위에 많았다.

이덕형이 시골생활을 물었을 때, 그것에 답해 지은 가사 ‘누항사(陋巷詞)’는 농촌의 빈한한 생활 속에 성현의 도를 닦는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안빈낙도(安貧樂道) 사상이 깔려있는 선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 입암

이 작품에 대해서는 이의가 많으나, 여헌 장현광(1554~1620)이 사망한 1637년 이후에 쓴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입암 풍경을 영주(영천) 풍경에 비유하면서, 입암기의 28경을 차례대로 읊었다. 영양사우(권극립, 전사상, 정사진, 손우남)가 여헌 선생을 초빙해 일제당에서 도의를 강의하는 모습과 여헌 선생이 남긴 28경은 옛 모습 그대로인데, 선생의 학덕을 기리면서 여생을 살리라는 소회를 읊은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무관, 가난한 시골 선비로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부모에 대한 효성 그리고 소박한 삶을 살았던 만큼 서민적이고 인간적인 모습과 자연을 글로 표현한 노계 박인로는 생전에 시조 67수와 가사 11편 그리고 110수의 한시를 남겼으며 조선중기 가사문학의 대가답게 현재까지 국문학자들의 연구논문만 해도 200여 편이 넘을 만큼 국문학 연구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노계문학관 건립과 노계백일장, 노계시낭송대회에 이어 앞으로 도계서원 주변에 노계문학공원과 한음길 등이 조성되고 충·효를 몸소 실천한 노계 선생의 문학과 삶을 기리는 선양사업들이 활발히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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