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2 임고면 선원리 아작골 원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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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2 임고면 선원리 아작골 원혼비
  • 이원석 기자
  • 승인 2020.05.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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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민간인 생명 앗아간 아작골엔 적막감만’
영천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등 600여 명 집단학살
원혼비, 영천시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건립 억울함 풀어줘

‘아작골, 아작골, 아작골…’ 지난해 누군가로부터 이 골짜기에 대해서 전해 들은 후 한 번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작’을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조금 단단한 것을 잘게 부스러지도록 깨물 때 나는 소리’라 나와 있고 ‘아작나다’는 ‘깨지고 망가지다’로 설명되어진다.

아작골
아작골

그랬다. 두 번의 시도 끝에 도착한 영천시 임고면 선원리 산87번지 일원인 아작골, 절골은 70년 전 수많은 민간인들이 아작난 희생자들의 원한이 사무쳐있는 곳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영천지역 국민보도연맹원 및 전선 접경지역 거주민 등 600여 명(신원 확인자 239명 포함)이 인민군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적법절차 없이 예비검속된 후 영천경찰서 및 지서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초순부터 9월 중순 사이에 이곳 임고면 아작골(절골)과 자양면 벌바위, 대창ㆍ고경ㆍ북안면 내 골짜기 등에서 영천경찰서 소속 경찰 및 지역 주둔 군대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학살되어 고귀한 생명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대한불교조계종 무상사
대한불교조계종 무상사

아작골로 가기 위해서는 임고서원 조옹대에서 출발해 포은단심로를 따라 일성부원군 묘소 쪽으로 2.5㎞ 정도 가다가 돌탑이 있는 곳에서 아래쪽 오솔길로 내려가면 된다. 한을 풀지 못한 많은 원혼들이 잠자고 있는 곳이라서 섬뜩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푸르른 늦봄의 자연은 평온함을 선사했다.

원혼비
원혼비

오랜 세월이 별다른 흔적을 남겨두지는 않았다. 절골에는 대한불교조계종 무상사가 자리 잡고 있었고 양항교 입구에 2010년 6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장과 영천시장이 함께 세운 영천지역 국민보도연맹사건 희생지 표지판과 2018년 8월 31일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자 전국유족회(영천유족회)와 사회적공론화 미디어투쟁단에서 건립한 원혼비가 정재호ㆍ정원흥 애국지사 추모비와 함께 당시의 참상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또한 임고강변공원에도 2018년 6월 한국전쟁전후영천민간인희생자유족회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건립한 영천시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져 그들의 넋을 기리고 있다.

영천시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영천시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세월이 너무나 많이 흘러서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참혹하게 희생된 고귀한 넋을 위로하고 생명과 인권의 존귀함을 일깨우는 움직임이 있어서 다행이고 다시는 이 땅에서 억울한 죽음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지난 2009년 9월 24일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 사건에 대해 작성한 내용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기에 영천지역 주민 구성운 등 20명이 경북 영천경찰서 소속 경찰 또는 영천군에 주둔하던 국군에게 국민보도연맹원 또는 전선 접경지역 거주민으로 인민군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살해된 사실을 확인했다.

 

희생자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연행되어 영천경찰서 및 각 지서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초순부터 9월 중순 사이에 임고면 아작골(절골), 자양면 벌바위, 대창면 용전리(어방리) 개망골, 고경면 내 골짜기, 북안면 내 골짜기 등에서 희생되었다.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진실규명대상자 20명과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과정에서 신원이 밝혀진 219명을 포함해 600여 명으로 추산된다.

 

진실규명대상자 및 희생거명자들은 ①1946년 10월사건 관련자ㆍ남로당 가입자ㆍ입산자 중 자수해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 ②이들에게 연루되었던 일가친척 ③산간지역과 전선 접경지역 주민 등 비무장 민간인들이었다. 직업별로는 농업 종사자가 약 90%를 차지하고 있다. 연령별로는 20~30대가 약 74%를 차지하고 있으며, 10대 이하 미성년자는 약 5%로 이 중 10세 이하 아동이 2명 포함되어 있다. 성별로는 남성이 대다수이나 여성 중에는 임산부가 포함되어 있다.

 

거주지별로는 영천 북부지역인 자양, 임고, 화산, 화남ㆍ화북면 주민이 약 66%를 차지했다. 특히 이 사건에서는 보도연맹원이 아닌 일반 주민들도 다수 희생되었는데, 금호면 도남동(현 영천시 도남동), 화북면 구전동(현 화남면 구전리), 화산면 당지동(현 화산면 당지리)처럼 가족 ㆍ친족 단위 또는 마을 단위로 살해된 경우도 있다.

 

희생자들은 1950년 7월 초순부터 1차로 살해되었다. 그리고 낙동강 전선이 형성되던 1950년 8월 7일에서 11일 사이에 임고면과 자양면 등 영천 북부의 전선 접경지역에서 380여 명이 2차로 살해되었다. 또한 영천ㆍ신녕전투가 벌어지던 9월 4일에서 10일 사이에 후방인 영천 남부의 고경면, 대창면, 북안면 등에서 영천경찰서에 장기 구금되어 있던 보도연맹원과 일부 피난민 등 170여 명이 3차로 살해되었다. 즉, 당시 영천은 한국전쟁의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군경 측은 인민군이 들어올 경우 주민들이 인민군에게 호응할지도 모른다고 미리 우려해 보도연맹원들과 일부 전선 접경지역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한 것으로 판단된다.

 

희생자들은 영천경찰서 및 각 지서 경찰이 민보단, 우익청년단, 방위대 등의 협조를 받아 연행하고 구금했다. 그리고 군과 경찰이 긴밀하게 협조해 살해했으며, CIC 등 계엄사령부 상층부의 지시하에 군 정보과와 경찰서 사찰계의 전문실무자들이 이 과정을 주도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당시 미CIC는 영천지역 보도연맹원의 예비검속 및 수사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이 사건의 진행과정을 인지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이 사건의 일차적 책임은 민간인을 법적 절차 없이 임의로 살해한 현지의 군경에게 있지만, 전시 계엄하에서 군경의 엄격한 상명하복식 지휘ㆍ명령체계를 고려할 때 하급부대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의 책임은 계엄사령부에 있으며, 그 궁극적인 책임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군경을 관리ㆍ감독해야 할 국가에 귀속된다.

 

유족들은 가족 구성원의 상실과 가족 해체, 연좌제 등에 의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과 차별을 받아왔다. 희생자가 많았던 몇몇 마을들은 사건 발생 후 마을공동체가 붕괴되기도 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의 공식 사과, 위령사업 지원, 마을공동체 복원을 위한 지원 및 유가족 생활 지원, 희생자와 관련된 공적 기록의 정정, 역사기록 수정 및 진실규명된 내용 등재, 평화ㆍ인권교육 강화 등을 통해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유족의 고통과 아픔을 치유하고 국민 화해의 계기를 마련하도록 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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