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1 성혈(성현암), 자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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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1 성혈(성현암), 자계정
  • 이원석 기자
  • 승인 2020.05.11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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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영천향교 오성위 위패와 포은 선생 영정 피난시킨 곳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 기룡산 중턱에는 ‘성혈(聖穴)’이 있는데, ‘성현암(聖賢岩)’이라 불리기도 한다. 면 소재지를 지나 영천댐 망향공원 조금 못 미친 왼쪽에 성현암과 신선암의 표지판이 나타난다. 성혈이라는 명칭은 보이지 않는다.

비탈길을 거슬러 1.2㎞ 정도 올라가면 협곡 사이로 신선이 노닐었음직한 풍광이 나타난다. 망향동산에 주차하고 솔숲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도 좋을 듯했다. 도시락까지 지참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먼저 신선암 대웅전이 나오고 위쪽으로 50m 정도 더 올라가면 성현암이 나타난다. 2008년 5월 24일 답사 때 있었던 성현암 왼쪽 입구를 감쌌던 조립식 패널은 철거되어 있었다.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하는 곳임을 알게 했고 기룡산에서 흘러내린 약수는 심신을 시원하게 했으며 작은 불상도 놓여있어 기도처임을 알 수 있었다.

약수
약수

신선암에서는 암자에서 생활하는듯한 여자분과 인사를 나누었으나 내부적으로는 비로암으로 바꿔 부르는듯한 성현암 요사채에는 인기척 없이 3마리의 강아지들이 방문자들을 경계했다.

성현암(성혈)의 내력을 알려주는 글
성현암(성혈)의 내력을 알려주는 글

일명 ‘성혈’로 불리는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영정과 영천향교 오성위(五聖位)의 위패를 피난시킨 곳으로 임고서원 원지에 ‘임진년 4월에 왜구가 침입해 심히 급한 시기에 사인 이현남(李縣男)이 선생의 영정을 자양 성혈사(聖穴寺)로 옮겼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듬해에 조종대(趙宗岱)의 계정(溪亭 : 지금의 자계정)으로 옮겨 모셨다가 4년 뒤인 정유재란에는 장항(獐項) 명상곡(明爽谷)에 숨겨졌으며 이듬해 원각촌사(圓覺村舍)로 옮겨 봉안했다.

1600년 옛터의 초가 1칸을 지어 봉안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0년 만에 도일동에 임고서원을 다시 지어 영정을 옮겨 모셨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성혈은 영천을 상징하는 포은 선생의 영정과 향교 오성위의 위패를 보존케 해준 성스러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정하원(鄭夏源, 1762~1833)이 지은 『운와집(雲窩集)』 권4 기(記)에도 성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성혈(聖穴)은 기룡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그 이름은 여지지(輿地誌)에 실려 있다. 아마도 산의 맥[龍脈]은 조(祖)를 태백으로 하고 모(母)를 보현으로 하는 듯한데, 꾸불꾸불 연이어 남쪽으로 달리다 천백장(千百文)으로 높이 솟아 있는 것이 기룡(騎龍)이요, 동서로 날개처럼 나뉘어 있어 마치 걸터앉은 듯도 하고 춤추는 듯도 하여 마치 어미에게 얼굴을 반대로 돌리고 있는 듯하기 때문에 모자산(母子山)이라 이름한다.

신선암
신선암

산의 중간 기지가 왼쪽으로 틀다 남쪽에 끊기고, 갑자기 하늘을 버팅기는 듯하다 갑자기 고개를 밑으로 떨어뜨려 앞으로는 자양(紫陽)의 한 골짜기에 임하여 오산의 남쪽 봉우리와 더불어 손님과 주인이 마주한 듯하다.

암석(石)이 중간 허리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곳에는 하얗게 두각(頭角)을 드러내어 귀신이 새기고 귀신이 깎아낸 듯 그 배꼽 부분에 구멍[穴]이 집을 만들어, 위로는 가히 비를 가리고 겉은 가히 바람과 눈을 막을 수 있으며, 그 가운데는 10여 명의 사람을 들일만 하다. 이 구멍은 음(陰)을 뒤로하고 양(陽)을 앞으로 하여 맑고 넓은 기운을 이끌고 맞아들이니 민간에서는 공암(孔巖)이라 부른다.

예전 임진왜란에 도적들의 횃불이 하늘을 찔러 그 전쟁의 재앙이 성전(聖殿)에까지 미치자, 이때 교예(校隷)가 남몰래 다섯 분 성인의 위패[五聖位]와 사판(祠板, 포은 선생 영정)을 짊어지고 달아나 공암에 받들어 갈무리하였다.

이에 기룡산의 한쪽 면은 드디어 40리(里)의 창평(昌平)이 되어 방패와 창이 들어오지 못하고 비린내 나고 더러운 것이 침범치 못하여 마침내 도적의 창을 면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성혈의 이름을 얻게 된 까닭이다.

그 후로 승려들이 구멍(성혈)을 암자로 삼아 부처를 모시면서 복을 기원하였다. 지금은 절(암자)은 헐어졌지만 부처는 오히려 남았으니, 아! 바위 구멍이 어찌 마음이 있겠는가? 지난날 전쟁이 창궐하던 때 성인(聖人)을 높이고 도(道)를 하던 공(功)이 지극하였으니 어찌 그리도 기이(奇異)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사문(沙門)을 저주하는 시대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허무를 담론하는 마당이 이루어졌으니 어찌 그리도 어그러질 수 있단 말인가?

자계정
자계정

생각건대 홍몽(鴻濠)이 비로소 갈라지던 최초에,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며 귀신이 보호하고 천지신명이 지켜주어, 그것으로 천 백년 사문(斯文)의 현회(顯晦)의 운수(運數)를 기다렸단 말인가?

예전 여산(廬山)에 와룡암이란 절집이 있었는데 주자(주희)께서 제갈무후(제갈량)의 유상(遺像)을 감추어 두고서 후인들로 하여금 제갈량을 존모(尊慕)하고 애호(愛護)케 하여 버리지 못하게 하였다. 하물며 이 성혈(聖穴)은 다만 와룡암과는 견줄 것이 아닌데, 어찌 성혈을 불교도들의 허무의 조상에다 맡겨 기룡산의 스님들로 하여금 밥을 공양하고 예(禮)를 드리게 한다면, 우리 도[吾道]가 거의 모두 총림(叢林)으로 들어가지 않겠는가?

자계선생한양조공유허비
자계선생한양조공유허비

혹시라도 마을 안의 벼슬아치와 선비들로 하여금 작은 정자를 짓게 하여 그것으로 성혈을 표시한다면, 또한 바름을 호위하고 이단을 배척하는 하나의 일은 될 것이다. 비록 불행하여 두 번이나 왜란을 만났지만 포은 선생의 영정과 공자님을 위시한 5성위(五聖位)의 위패가 또한 돌아옴이 있어 온전히 보존되었다. 나는 그윽이 느낀 바가 있어 이로 인하여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하여 성혈의 고사(故事)로 삼아 남긴다 말하노라.

성현암에서 도로로 나와 보현쪽으로 1km 채 못가면 자계정(紫溪亭)이 나온다. 자계정은 조선 중종 시대의 학자이며 참봉을 역임한 조문림이 그의 스승인 조광조 선생이 기묘사화로 참화를 당하자 이곳으로 피신해 두문불출하며 경학을 연구하며 강론한 곳이며 임진왜란 때는 포은 선생의 영정과 향교 5성위의 위패가 잠시 피난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의 건물은 후손들이 추모하여 세운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 지붕이며, 좌측 2칸, 우측 1칸의 방과 사이에 대청이 있고 전면에 쪽마루를 달았다. 앞에는 '자계선생한양조공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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