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석의 도쿄통신 54> 천황의 은혜(?)와 수양산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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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도쿄통신 54> 천황의 은혜(?)와 수양산 그늘
  • 박정석(도쿄 거주)
  • 승인 2019.11.1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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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 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이는 수양산 그늘진 곳에 아름답기로 유명한 강동땅 팔십 리가 펼쳐졌다는 뜻으로, 어떤 한 사람이 크게 되면 친척이나 친구들까지 그 덕을 입게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또 부모님의 자식에 대한 영향력을 이야기 할 때도 많이 인용한다.

이 수양산 그늘을 일본에 대입하면 아마도 <천황(天皇)의 은혜>라는 ‘수양산 그늘진 곳’이 될 것이다. 그들은 고대부터 근세까지 인간이 아닌 신격화된 존재로서의 천황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 필자가 읽고 있는 책은 한국인이 쓴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이다. 1943년 1월 1일 새해벽두 일기에서 신격화는 “대동아성전 2주년인 1943년 신춘을 맞이하여 1억 민초는 엎드려 삼가 폐하의 만수무강하심과 황실의 더욱 번영하심을 봉축하는 바이다”… 12월 8일 신격화는 “대동아전쟁 2주년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동쪽으로 멀리 궁성을 향하여 요배하고 묵도를 하였다”….

그 신격화는 맥아더에 의해서 세계2차대전 패망 후 키작은 볼품없는 천황을 전 일본 국민은 충격적으로 보았고, 인간선언이라는 더 큰 충격 속에 방송을 들어야 했었다. 또 맥아더는 헌법에 있어서 천황의 모든 실권을 없애버렸다. 그 후…

인간선언은 어디까지 왔으며, 신격화는 사라졌을까? 만세일계(万世一系)로 고대부터 혈통적 단절없이 126대까지 이어져왔다는 천황! 필자가 느끼기에 그 어느 것도 미흡한 듯 느껴진다. 일본 사회적, 문화적 정서 속에 천황은 인간 선언이 안된 듯, 신격화가 없어지지 않은 듯 깊숙히 녹아져 있다. 물론 일본 헌법 속에서의 천황은 어느 입헌군주제 국가와 다를바 없는 수사로 채워져 있다.

【일본헌법 제1조】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으로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존재하는 일본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日本国憲法 第一条】天皇は、日本國の象徵であり日本國民統合の象徵であつて、この地位は、主權の存する日本國民の總意に基く。

일본 국민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여권! 그러나 여권 없는 천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몇년전 지금의 천황이 황태자 때 부부가 잠시 언론에 중심에 섰을 때 “그들(천황이나 황태자 부부 등)이 갖고 있는 것은 인권이 아니라 특권이다.”라고 당당히 말한 이들이 있었다. 실제로 천황제 하에서 왕실의 인권은 상당히 침해되어 있다.

우선 몇가지만 예로 들어보자.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다. 사상의 자유가 없다. 표현의 자유도 없다. 국가의 상징인 한 나라를 비판할 수 없다.  마치 로마의 휴일에서의 진정한 자유가 없는 궁중 생활의 따분함을 연상케하는 내용들이다. 이래도 완전히 인간선언이 된 것일까? 이래도 완전히 신의 위치에서 내려온 것일까?

일본인들의 생활 곳곳에는 천황의 흔적이 많이도 묻어 있다. 많은 스포츠대회에 천황컵이 있다.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같은 업종에 30년 이상 근무하고 관련 단체에 추천이 있을시 선별하여 천황이름으로 상장이 주어진다. 일본 전 국민은 천황의 집권 시기를 나타내는 연호(年號) 속에 살고 있다. 여권의 표지에는 천황의 국화 문장이 찍혀 있다.(오동나무 문양도 천황가에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정부의 마크로 사용되어지고 있다)

곳곳의 신사에는 황조신(천황의 조상신)이 모셔져 있다. 일본 정부가 ‘바다의 날’로 선포한 7월 20일은 그 유래가 120년 전 메이지 천황이 배로 지방을 돈 뒤 요코하마에 귀향한 날이었다. 문화의 날은 메이지 천황의 탄생일이고 근로감사의 날은 황실 조상의 제삿날이다.

일본의 헌법상 상징적인 천황은 지금까지 ‘공기’에 비유되어 왔다. 세계 2차대전 말기를 다룬 영화에서 공기의 힘은 절정에 이른다. 모든 내각과 장군들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끝내야함을 알면서도 천황 앞에 감히 공기의 힘에 눌리어 이야기하지 못한다. 그래서 천황이 전쟁을 끝내야겠다고 회의에 선언을 하게 된다.

어디에나 있지만 공기는 느끼지 못하는 것,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공기와 천황은 같다는 것이다. 국가의 일에 있어 헌법상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이와같이 천황이 국민들의 존경을 받으며 정서에 끼치는 영향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매우 크다. 이와같은 현실은 헌법이 바뀌었어도, 인간선언과 신격화가 더이상 되고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본인들은 천황을 향해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일본 학자들은 말한다.

일본인들에게 있어 천황제는 교과서적 논리가 아니다. 화합의 중심이고 전통이자 정신적 기반인 것이다. 천황에 대한 열렬한 지지 기반이 조금씩 세월과 더불어 풍화되어지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긴세월 공기처럼 존재해 왔던 제도를 감히 없애기에는 정서적으로 너무나 밀착되어져 있다 하겠다.

특히 19세기말의 근대화와 전쟁의 참담한 상황 속에 일본인들은 천황을 화합의 중심으로 힘을 뭉쳐 오늘날의 기적적으로 세계적 경제 대국을 이루었다고 철저히 믿는 듯하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존재하는 한 천황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감히 단정해도 될 듯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수양산 그늘과 같은 천황의 은혜는 일본 국민의 정서이기도 하다.

언제쯤 이방인들이 느끼는 특권 없는 인간으로의 천황 강림이 있을까? 기다림은 너무 어리석을 수 있는 먼 미래일 것이다.

※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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