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석의 도쿄통신 32〉 일본인에게 존경받는 10대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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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도쿄통신 32〉 일본인에게 존경받는 10대 인물 시리즈
  • 박정석(도쿄 거주)
  • 승인 2018.09.1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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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8. 18]

일본 역사의 大변혁기는 전국시대이다. 이 역사의 중심적 출발은 오다 노부나가였으나 운명의 여신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웃음을 지었다.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 지금의 나고야겐 ] 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조대신[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고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천민으로 태어나 오다 휘하 졸병으로 들어가 추운 겨울날, 오다의 신발을 품에 넣어 따뜻하게 만들어 이를 본 오다가 매우 기뻐하여 승진를 빨리 한 경우라고 하죠. 기회를 잘 보고 머리를 잘 써서 장수에 올랐고 오다가 혼노지에서 부하 아케치 미츠히데 배반으로 자결한 뒤 병력을 이끌고 아케치를 죽여 원수를 갚고 정당히 최고 자리에 오른다.

일본인들에게는 토요토미는 천한 계급으로 태어나 최고 자리에 오른 잔머리도 잘쓰는 위인으로 존경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 통일을 해나가면서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상징적인 건물로 일본 최고의 성을 지었다. 이것이 오사카성이다.

너무 아름답워서 부럽고 속상한다. 역사에서 일본은 중국과의 사대관계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시대였다. 일설에 의하면 조선이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었던 이유가 중국의 황제가 2층에 거하니 더 높은 건물을 조선에서는 지울 수 없는 제약을 받았다고 하는 설이 있다. 다름아닌 중국에 조공을 바친 사대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은 그때까지 되풀이되던 왜구의 노략질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총 47만 병력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조선은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명나라의 협조와 전열을 정비한 관군, 의병 및 이순신 수군의 활약으로 왜구를 모두 퇴각시켰다.

이 전란으로 조선은 귀중한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노략질을 당했다. 또 조선의 도공(陶工)을 납치한 일본은 영국과 중국의 아편 전쟁을 계기로 수출의 큰 기회를 잡는다. 그리하여 도자기 문화를 크게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 명언
여기 두견새 한 마리가 있다. 그런데 이 새가 울지를 않는다. 이 새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전국시대의 중심인물(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 사람은 각자 답을 달리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언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울게하겠다."였다.

과연 전국시대에 살아 남은 무사! 생김새가 못생겨 원숭이를 닮았다 하여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원숭이라고 놀림을 받았으나 지혜가 많다는 칭찬을 받은 인물의 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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