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석의 도쿄통신 13〉일본 언론은 악을 선의 역사로 재구성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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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석의 도쿄통신 13〉일본 언론은 악을 선의 역사로 재구성하고 싶은가?
  • 박정석(도쿄 거주)
  • 승인 2018.02.0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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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언론이 꾸미고 싶은 다시보는 진주만 공격!(진주만 공격 → 미국은 미리 알았다? )

얼마전 일본의 좌익으로 분류되는 아사히신문 역사편에서 진주만 공격을 미국이 먼저 알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방치했다는 물음표를 단 기사를 내보냈다.

1941년 12월 8일 새벽 일본 해군 주도의 진주만 공격이 미국과 일본의 본격적인 전쟁을 가져왔다. 그러나 미국은 알면서 일본을 칠 수 있는 명분을 찾던 중 의도적으로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둔 역사적 배경과 학자들의 책을 참고하며 자기 반성의 죄책감보다는 자기들의 믿고 싶은 상황을 물음표를 달면서 편집한 것으로 필자는 느껴진다.

기사 내용을 참고하면 중국과의 전면전을 치르고 있던 일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일본에 압박을 가했다. 일본과의 통상 항해조약 파기, 미국내의 일본 자산 동결, 석유 수출 금지 등으로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국무장관을 설득했으나 미국은 추가적으로 전쟁 시작 한 달 전 일본에게 중국과 인도지나로부터 철수를 요구 받았다. 이에 격분한 일본 정치인들은 전쟁을 결의하고 12월 8일 진주만 공격을 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다. 지금 일본의 유튜브에서도 당시의 국회 관련 정보에 정치인들이 전쟁 선포와 같은 격노하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전쟁을 일으키게 되는 계기 중 제일 큰 미국의 압박은 석유수출 금지였다고 일본의 학자들은 이야기한다.

당시의 세계에 석유 수출을 하는 나라는 지금의 아랍제국들이 아니었는 듯하다. 미국이 중심이었다는 증거다. 석유 수입의 다변화가 불가능 한 시대적 상황의 증거다. 사우디는 1938년에 Al Ahsa 지역에 거대한 유전을 발견하게 되었고 미국의 영향력이 있는 현재까지의 사우디 석유 발주처인 아람코가 1941년에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또 일본 아사히 신문의 기사는 미국의 역사 학자 찰스ㆍAㆍ비아토가 1946년에 쓴 일본 번역본 『전쟁책임 어디에 있는가』라는 책을 인용했다. 내용인즉 미국 정부가 일본이 공격해오는 내용을 알면서도 하와이 군사령관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 다른 주장은 미국의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가 일본의 항모가 진주만으로 향하는 여러 정보의 내용을 미국에 알렸다고 주장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육군장관의 대화 내용도 함께! 과연 그럴까? 항상 지난 역사에 대한 왜곡은 역사 속 조금의 가능성을 확대 재생산임을 우리는 여러번 보았다.

【일본언론도 동조하는 역사왜곡】

상기의 아사히 신문이 인용한 내용은 너무나 왜곡이 심하다. 역사 인식에 만약이라는 가정을 자주 사용함은 추하다. 군 관계에 깊은 지식이 없는 필자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가 출판한 책에 주목한다.

잘못된 역사교육으로 인해서 인기가 없는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을 오늘날까지 미군을 주둔게하고 평화를 가져오게 한 1등 공신으로 외교의 천재였다. 당시 미국의 조야가 제국주의 일본에 친밀감을 가지고 있을 때 이승만 박사는 1941년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라는 책을 미국에서 썼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을 공격할 것이고 공격을 한다면 하와이를 먼저 공격할 것이라고 적혀있었지만 미국의 지성인들과 정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미국의 국민들도.

그러나 1941년 12월 8일에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가면을 벗긴다』라는 책은 불티나듯 팔려나가서 이승만 박사가 부자가 되어 하와이에 집을 구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왜? 일본정부는 언론은 자기 중심적 역사 해석을 하나? 혹시나 아직도 침략의 근성이 남아있나를 의심케 한다.

필자가 또 주목하고 싶은 대목은 【역사적 행위의 NO반성이다.】2016년 5월 27일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히로시마 방문때를 기억한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일으킨 반성은 온데 간데 없었고, 원폭의 피해를 입은 역사적 사실을 열거하며 자기들이 인류 최초의 불쌍한 핵무기 피해자였음을 신문과 방송이 왜곡을 했다.

당시 한국의 언론은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반대하는 글이 많았다. 그때 오바마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조기 종전을 위한 미국 행위에 대한 사죄 요구는 받지 않았고 연설에서 사죄하지 않았다”고 여러 뉴스를 통해서 전해졌다.

히로시마는 미국이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8월 6일 원자폭탄을 투하한 곳이다. 1945년 원자폭탄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서 14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중 징용으로 끌려와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 2만 명도 원폭 피해를 입었다. 역사에 있어서 철저한 반성이 없는 국가는 조금의 빈틈이 있으면 집요하게 마치 자기들이 만든 악이 선으로 바꿀 찬스로 여기며 왜곡을 시작한다.

당시 히로시마에 원폭으로 사망한 한인들을 위로하는 의령비는 1970년 4월 제막 당시에는 평화공원 안에 있지 않았다. 당시 히로시마 민단이 중심이 된 건립위원회는 평화공원 내 건립을 희망했다. 그러나 공원 안에는 각종 위령비와 기념비가 많다는 이유로 평화공원 밖에 건립됐다. 이후 재일한국인들이 지속적으로 공원 안으로 옮겨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마침내 인심쓰듯 히로시마 시당국의 승인을 받아 29년 만인 1999년 평화공원 내로 이전 설치됐다.

마치 최근의 헤이트스피치 법률을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민단이 세계적 인권기관에 한국정부와 함께 진정서 제출 후 부끄러워서 마지 못해서 통과시킨 것과 같은 예라 하겠다.

일본의 역사 인식! 아직도 갈길이 멀게 느껴지고, 언론의 보도 형태는 유치함을 느끼는 오늘이고, 내 조국의 부국강병을 기도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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