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의 영별을 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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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영별을 곡함
  • 이원석 편집국장
  • 승인 2007.08.23 09:42
  •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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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레까?(누구냐?).” “오레다(나다).”

일본 동경의 한 다다미방에서 기다리던 내가 나무계단을 오르는 발자국소리를 듣고 L과 익살스럽게 장난치며 즐겁게 나누던 대화였다.

1988년 당시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교 3학년에 복학했던 나는 그때만 해도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일본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행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여권도 직접 교부받았고 부산의 일본영사관을 찾아가 우여곡절 끝에 비자도 발급 받았다.

부(釜)-관(關) 페리호를 타고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우연히 배에서 만나 친구가 된 미야자카 에이지와 함께 동경까지 갔다.

미야자카와 헤어져 랭귀지스쿨에 다니던 대학교 선배들을 만났고, 한 선배의 집에 기거하던 중 그 선배부인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할 무렵 L에게서 연락이 왔다. “일본에 왔으면 나한테 와야지 왜 선배들에게 가있냐”며 나와의 만남을 재촉했다.

키치죠오지 전철역에서 만나 타국에서의 반가움을 나눈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산 진로소주로 동경의 밤을 달구었다. 요미우리신문 장학생으로 조간과 석간을 배달하고 낮에는 학교에 다니던 L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일본의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우리는 너무 행복했었다.

낯선 땅에서 정에 굶주렸던 L은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좋아하는 것 같았고, 나는 최소한의 경비만 준비해 텐트와 침낭을 메고 떠나는 나를 향해 무모한 짓이라며 말리던 지인들에게 2달여의 여행경험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흐뭇했다.

부산항을 출발할 때만 해도 형편이 여의치 않으면 시모노세키 항구에서 일본 땅만 밟아보고 돌아와도 아쉬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나의 귀국날짜가 가까워지면서 우리의 아쉬움은 쌓여갔고, 나리타공항까지 배웅 나온 친구는 가진 돈이 없어 아무런 선물도 사지 못하는 내가 안타까웠든지 면세점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까지 챙겨주었다.

오늘 아침에 대구의 한 친구에게서 청천벽력같은 전화를 받았다. L이 죽었다고 했다. 그것도 지병이나 급작스런 사건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자살했다는 것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사실에 꿈인 듯 몽롱했다.

지난주 다른 친구로부터 요즘 L이 가정문제로 몹시 힘들어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즉시 전화라도 해보려다가 괜히 자존심이 상할까봐 잘 해결되길 바라며 그냥 넘겼었다. 얼마나 심적으로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이해해보려고 생각해도 너무너무 아쉬움이 남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간혹 만나고 전화통화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정을 나누었는데…. 갑자기 생활이 바빠지면서 전화조차 뜸하게 되고 대학친구들의 모임에도 거의 참석하지 못했었다.

친구들끼리 모여 술에 취한 새벽녘이면 L은 매번 전화해서 보고 싶다며 지금 대구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럴 때면 “늦어서 오늘은 못 가고 시간을 내어 조만간 한 번 찾아갈게.”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 조만간의 시간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지금까지도 만들지 못했다.

오후에 친구들을 만나 병원으로 문상을 가기로 했다. 참 아리고 슬프고 회한이 너무 많이 남는다. 미안한 마음은 친구의 영정을 보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 같다.

1983년 봄, 대학교 신입생이었을 때 하루는 그가 할 얘기가 있다며 따로 좀 만나자고 했다. 진지한 그의 모습에 ‘뭔가 실수라도 한 게 있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는 토요일 열리는 일일찻집 티켓을 샀다며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일일찻집에서 나와 생맥주 집으로 옮겨 앉아 한다는 소리가 “구미에서 올라온 촌놈이라 친구가 없는데 네가 마음에 든다.”며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고 말했다. 그 후 2년간 각별한 정을 나눴고 군 면제를 받았던 그는 졸업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었다.

친구들은 군대에 가서 모두들 고생하는데 자기는 못가서 미안하다며 한겨울에 구미에서 부산까지 도보로 무전여행을 하기도 했고 머리를 깎고 합천 해인사에서 도를 닦는다며 엉뚱한 기행을 일삼는 등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늘 순수함을 간직하며 마음을 편하게 해 주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제는 만날 수 없다. 나리타공항을 떠나며 나는 “너의 은혜 언젠가는 꼭 갚을게?”라고 다짐했건만 아무 것도 해준 게 없는 것 같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조금만 대화상대가 되어주며 고민을 들어줄 수만 있었어도 이런 극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나, 어쩌나, 어쩌나.

사랑하는 친구야! 일본에서 서울에서 대구에서 난 늘 너에게 받기만 했고 아무 것도 못해 주었구나. 못난 친구 용서하고 저 세상에서는 부디 행복하여라.

부모님과 가족, 친구들에게 크나큰 아픔을 주고 떠난 친구와 며칠간 영혼의 대화들을 나눈 뒤 구미 형곡동 선산과 내 마음속에 묻고 돌아왔다. 남은 이들에게 크나큰 아쉬움을 주고 떠났지만 다른 세상에서는 늘 행복하기를 기원하며….

 

영천뉴스24 이원석 기자 ycnews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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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석 2007-08-31 16:41:21
친구의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홈페이지에 쓴 글입니다.
회원들의 댓글을 보니 다시 가슴이 아려져 오네요.

들빛 2007-08-31 16:35:41
젊은 나이에 세상에서 恨만 삮히다 가신 분 같네요. 명복을 빌어봅니다.

별님 2007-08-31 16:34:54
그냥..... 무척 슬픈생각이 듭니다 ...신소님도 힘내세요

명기 2007-08-31 16:34:02
언제나 그 흔적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이원석 2007-08-31 16:33:20
부모님과 가족들, 친구들에게 많은 아픔을 주고 떠난 L과 밤새껏 많은 대화를 나누고 새벽기차를 타고 영천으로 내려왔습니다. 생전에 못한 보답으로 친구의 마지막 가는길 제손으로 묻어주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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