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운 현실… 북한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상태바
안타까운 현실… 북한위해 끊임없이 기도해야
  • 구경본 목사(영천지역 교역자회 회장, 동도교회)
  • 승인 2008.07.01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포은선생의 혼이 남아 있는 선죽교 앞에선 구경본 목사

그립고 보고 싶은 북한방문에 초청한다는 총회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의 통보를 받은 것은 지난 2월초였다. 5월 29일 북한방문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동안 한 번은 북한을 방문할 기회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열망하던 차에 경동노회 남북한선교동일위원장이기 때문에 초청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초청에 응하기로 하고 여행경비는 총회에서 부담을 하고 신청비 약간과 사진과 신상명세를 총회에 제출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떻게나 기다림의 날짜가 긴지 지루함이 그지없었다.

드디어 방문일자가 다가왔다. 5월 28일 KTX 밤차로 서울 백주년기념관 숙소에 가서 1박 하고 29일 새벽 5시30분에 북한방문행 버스에 올랐다.

각 노회대표로 1인씩 64명과 4명의 임원들 도합 68명이 버스 2대로 장도에 올랐다. 버스는 자유로를 신나게 달렸다.

불과 2시간 만에 남측출입국관리사무소에 도착하여 입경(入境)수속을 밟고 북한출입국관리사무소를 지나서 우리들을 태운 버스는 개성공단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저기 공장들이 세워졌고 또한 공사가 한창이다. 현재 개성공단의 근무자는 6만8천여 명인데, 북측 근로

자들은 약 2만6천여 명이라 했다.

드디어 버스는 개성공단을 지나 인구 6만여 명의 개성시내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 그런데 심히 놀라고 말았다.

도시 전체가 어두움에 깊이 잠이 든 것처럼 낡은 회색 건물들이 적막에 싸여 있었다. 군데군데 김일성 부자를 찬양하는 글귀들만 붉게 써 있었고, 가게도 간판도 잘 보이지 않고, 골목골목 어귀마다 젊은 군인들이 북한주민들의 버스에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도로에 차선도 없고 차도 없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몇몇의 사람들만 보일 뿐이다. 강원도 태백의 폐쇄된 탄광촌으로 연상되는 그런 모습이 아닌가!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는 북한사회의 현실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북한 안내원은 개성시의 유래와 박연폭포, 임신한 여인이 머리를 풀고 누워있는 모습의 왕건의 송악산, 정몽주의 선죽교 등 관광지 설명에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버스는 황진이의 사연을 담은 박연폭포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들판을 달리고 있는데, 벼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밭에는 보리와 감자들이 듬성듬성 자라고 있었는데 하나도 제대로 수확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없었다. 또 옥수수들은 이제 갓 모종을 이식한 듯 아주 어리게 보였다.

그래서 평양에 봉수교회를 건축하는 총책임을 맡고 계시는 K장로님께 “왜 이렇습니까?” 하니까 해마다 우리 남한에서 못자리용 비닐과 비료를 공급해 왔었는데, 올해는 우리나라의 정권이 바뀌면서 비닐과 비료가 제때에 제공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실정이라는 말이다.

8월이 되면 굶어서 죽는 아사자들이 속출할 것이라며 큰일이라는 것이다. 지난해의 홍수피해와 올 해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하여 어려울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 가슴이 짓눌려 옴을 어찌 말로다 표현할 수 있으랴? 또 밭에는 자갈들이 많은데 왜 골라내지 않느냐고 물으니,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힘든 일을 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버스는 박연폭포를 향하여 계속 달리고 있었다. 도로에 접한 마을로 향하는 길목마다 북한의 젊은 군인들이 통제를 하고 있었다. 그 수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드디어 버스는 박연폭포에 도착했다. ‘이 사랑 영원히 노래하라 박연폭포여’라는 비문을 뒤로하고 200m 정도 가니까 말로만 듣던 아름다운 박연폭포가 그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황진이의 웃음소리와 걸맞게 폭포수의 흘러내림의 소리도 아름답고 시원하게 들린다. 폭포를 카메라에 담기에 여념이 없었다.

또 폭포 위쪽에 자리 잡고 있는 관음사에 올라가 모든 만병이 낫는다는 시원한 약수 한바가지를 들이키고 다시 박연폭포로 내려와 아쉬움을 뒤로 하고 관광도 식후경이라 개성시내로 30분정도 버스가 달려 도착한 곳은 민속촌이라는 곳으로 옛날 고려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된 곳으로서 13첩 반찬이 하나하나 놋그릇에 정성스레 담겨져 있었다.

▲ 박연폭포

뚜껑들을 열자 그 안에는 북한에서 재배한 채소 반찬들이었으며, 고기라고는 동태졸임 한 가지 뿐이었다. 북측에서는 특별한 날 외에는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것이다.

맛있게 점심식사를 한 후 관광객들을 위한 상점에 들러 북한산 고사리, 고려청자, 각종 버섯, 우표, 약재 등을 구경하고 작은 청자 몇 개와 방짜 놋수저 몇 개를 샀다.

점원 아가씨를 보고 ‘아가씨’라 부르니 기분 나쁘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부르면 되느냐? 물으니 ‘접대원 동무’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측에서는 ‘접대부’라는 말은 천하게 쓰여 지는 말이라고 하면서 ‘아가씨’는 처녀를 높이는 말로 쓴다고 하자, 그제야 미소로 화답하는 것이다.

같은 민족이면서 이렇게 언어가 완전히 다르게 이해되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분단 60여년의 세월이 언어의 장벽도 만들고 말았다는 가슴 아픈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쇼핑 후 포은 정몽주선생의 생가터였던 숭양서원(崇陽書院)을 관광하고, 정몽주 선생이 이방원의 수하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선죽교(善竹橋)를 찾았다. 포은 선생의 굳은 절개가 우리의 굳은 신앙의지로 승화되어야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면서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개성 평양간 고속도로에 올랐는데, 고속도로에도 차선이 없고 차도 다니지 않고 군데군데 군인들이 주민들의 고속도로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다.

평양 봉수교회는 예장 통합 전국남선교회연합회에서 전국교회의 지원을 받아 1200석의 예배당을 약34억을 들여 준공하고 지난해에 입당을 하였고, 올 7월17일에 헌당예배를 드리려고 하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면이 있으나 그래도 북한사회에서 찬송이 불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세 분의 목사님이 강단을 맡으셔서 예배를 인도하시고 계시는데, 남측에서 어느 분이시든지 오셔서 예배인도와 설교를 하실 수 있다고 한다.

북한인구가 약 2,300여만 명인데. 아무리 체제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김정일 위원장을 추종하는 최측근 세력이 약 200만여 명이고, 끝까지 김 위원장을 따르겠다는 사람이 약700만여 명이라고 하는데, 모든 혜택이 이들에게만 치중되고 있다고 한다. 북한주민 돕기 성금이나 자금은 하층 주민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다.

이번에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나는 이래도 저래도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을 피부로 느끼면서 우리 모두 북한선교를 위하여 구국기도를 끊임없이 그리고 많이 해야겠다고 독자 여러분께 호소 드리는 바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