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땅에 숨쉬는 포은 선생의 유적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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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땅에 숨쉬는 포은 선생의 유적탐방
  • 성영관 영천문화원장
  • 승인 2008.06.09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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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선생의 혼이 살아 숨쉬는 북녘 땅 개성에 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떴다.

6월 5일 밤 11시30분경 영천역에서 개성행 관광열차를 타고 역사문화유적 탐방에 나섰다. 경북문화원연합회 산하 19명의 문화원장과 함께.

밤새달려 임진강역에 도착했고 지정된 버스에 올라 경의선도로 남북출입사무소 2층 식당에서 곰탕으로 맛있는 아침식사를 했다.

아침 7시경 1층 게이트에서 발권 및 출경수속을 마치고 버스를 탄 채 군사분계선을 통과해 북측 출입사무소에서 입경수속을 마쳤다.

▲ 박연폭포

첫 번째 탐방코스는 박연폭포. 위쪽에 있는 직경 8m의 바가지모양으로 패여 생긴 못에 담겼다가 떨어지는 것이 박연폭포다.

바위 위에서 흘러내리는 절경에 잠시 넋을 잃었다. 시원스런 물줄기와 소(沼)는 티와 이끼하나 없어보였다.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폭포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폭포에서 관음사로 올라가다가 오른쪽에 범사정이라는 정자에서 폭포의 절경을 감상했다. 용바위에는 황진이가 폭포의 절경에 감탄해 머릿결을 붓 삼아 써내려갔다고 알려진 시가 남아있다고 했다.

함께 어울려 사진을 찍으며 마음껏 자연의 비경에 취한 후 비탈길을 1㎞ 정도 올라가니 고려 때 축성한 북측의 국보유물인 대흥산성(大興山城)이 나타났고 북문을 지나니 송도3절의 하나로 970년(고려광종 21)에 세워진 관음사가 반겼다.

대웅전에 들어서니 머리를 깎지 않은 스님이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있었다. 관광객중에 불전을 넣고 기도 삼배하는 이들이 많았다.

▲ 관음사

폭포로 다시 내려와서 12시경 개성시내에서 13칠첩 반상기로 쇠고기국밥정식을 먹은 후 다음 코스인 포은 선생을 모신 숭양서원으로 향했다.

▲ 숭양서원에 모셔진 포은 선생의 위패

숭양서원은 1573년(선조 6) 포은 선생이 살던 집터에 문충당이란 이름으로 세워져 선생과 서경덕의 위패를 모셨다가 1575년(선조 6) ‘숭양’으로 사액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68년(현종 9)에 김상헌을, 1681년(숙종 7) 김육과 조익을, 1784년(정조 8) 우현보를 추가로 배향했다.

숭양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겨진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일 정도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서원의 뒤로는 자남산을 등지고 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가 마주서있고 축대 위를 오르면 강당이 나오고 뒤쪽 담장에 난 삼문을 지나면 사당인 문충당에 이른다.

숭양서원은 임진왜란 이전의 목조건물로 서원 건축양식의 전형적인 배치와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요즘 영천의 포은숭모사업회뿐만 아니라 경기도 용인에서도 용인문화원 주최로 포은문화축제가 열리고 있고 영일에서도 포은문화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다.

영천문화원에서 6월 19일 오전 10시 문화학교 실버대학 개강과 함께 임고면에서 포은풍선아트 실버대학이 예정되어 있고 지난해에 문화원 가족들이 용인의 포은선생 묘역을 다녀온 터라 더욱더 의미심장했다.

영천이 포은 선생의 출생지임을 늘 자랑스러워하며 포은 선생의 성역화사업에 전 시민들이 동참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숭양서원에 이어 선죽교와 표충비로 안내를 받았다.

▲ 선죽교

선죽교는 고려충절의 상징물로 포은 정몽주 선생이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다가 그의 아들 이방원에게 철퇴를 맞아 숨진 곳이다.

본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으나 선생이 살해당한 뒤 그의 선혈이 얼룩진 자리에 대나무가 피어났다고 하여 선죽교(善竹橋)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범사정

1780년(정조 4) 선생의 후손인 개성유수 정호인이 다리를 밟고 다니는 것이 안타까워 다리주위에 돌난간을 설치하여 보호하고 옆에 별교(別橋)를 세워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다리 동쪽에는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쓴 선죽교비가 있고 옆의 각에는 창녕부원군 성여완(成汝完)의 비문이 세워져 있다.

표충각에는 고려왕조의 절개를 지킨 포은 선생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영조와 고종이 세운 표충비가 있고, 암수 거북위에 새겨진 표충비는 예로부터 자식을 낳는데 효험이 있는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거북머리에 여러 사람들이 만진 것으로 보이는 때가 묻어 있었다.

다음으로 고려박물관(고려성균관)을 관람했다. 고려성균관은 고려시대의 최고 국립교육기관으로 992년 국자감(國子監)으로 설립되었다가 이후 성균관으로 개칭되었다.

▲ 함께 개성문화역사탐방을 한 경북문화원연합회 산하 문화원장들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구분하기 위해 고려성균관으로 부르고 있는 이곳은 1988년부터 고려시대의 유물을 한데 모은 고려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명륜당, 대성전, 동 서재 등 18동에 해당하는 건물들과 역사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야외에는 헌화사 7층석탑, 헌화사비, 불일사 5층석탑, 개국사 석등, 전시관에는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다양한 청자, 대장경판목, 고려시대 생활용품과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박물관의 진열상태는 열악해보였다.

고려 500년 역사가 살아 숨쉬는 역사, 문화, 유적의 도시. 서울과 불과 70㎞밖에 떨어져있지 않고 서울에서 1시간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 단절된 남북이 하나 될 날은 과연 언제일까?

개성공단은 참 잘한 사업인 것 같다. 차를 타고 개성공단을 한바퀴 돌아보니 H빔 철골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남과 북의 차이와 이해의 차를 느꼈고 북측주민의 주거환경과 농사짓는 모습 등을 통해 양측의 경제적 차이가 많은 것을 실감했다.

어려운 북녘동포를 생각하며 우리국민들도 근검절약하고 사회 안녕질서를 잘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1세기는 문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로 그 민족의 가치척도는 문화가 될 것이다. 영천문화원은 시민과 함께 연구노력하며 지역문화 창달에 앞장서 나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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