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선생의 효(孝), 의(義), 충(忠)’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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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선생의 효(孝), 의(義), 충(忠)’ 찾아가는 길
  • 최은하 기자
  • 승인 2013.04.29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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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향토사연구회 고결한 유산, 포은 정몽주 선생 유적 답사

 

▲ 최은하 기자

포은 정몽주 선생의 덕행과 그의 충효정신은 오랜 시간 영천인들이 한결같이 지켜온 정신적 가치이다.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박세호)에서 포은 정몽주 선생 유적 일대의 답사를 반복하기가 여러 차례이지만 성역화사업을 마친 서원의 현재를 되짚는다는 것이 또 한 번 선생의 유적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이번 답사를 총괄 진행한 본회 회원이자 경북문화유산해설사인 김종식 해설사는 답사 수순을 계획하며 어떤 것을 주제로 할 것인지에 대해 조금은 고민이 되었을 것이다. 수차례 반복되었던 우리들의 답사가 이번엔 또 다른 의미로 기억되길 바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28일 아침 임고서원에 도착한 영천향토사연구회 회원들은 먼저 영상관으로 안내되었다.

▲ 임고서원 마당의 단심로 표지판을 보고 있는 영천향토사연구회원들

영상관에서는 포은선생의 일대기를 아주 쉽게 풀어낸 에니메이션 영상물이 상영되었다. 선생의 업적과 숭고한 정신적 가치를 아주 편안하게 익히고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영상물이었다.

이 영상물을 보고 우리는 여종 춘월의 편지를 대필해주었던 부분을 곱씹어 이야기했다.
포은 선생이 9세 되던 해에 전장에 나간 애인을 둔 문맹의 여종 춘월을 대신하여 정인에게 보내도록 편지를 대필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내용은 雲聚山月盈虧妾心不移(운취산월영휴첩심불이,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 이지러질지라도 첩의 마음은 변치 않겠습니다.)라는 열자의 글귀였다. 그러나 춘월은 열자로는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으니 더 길게 적어달라고 졸랐고 선생이 '緘了却開添一語 世間多病是想思(함료각개첨일어 세간다병시상사)’라는 글자를 더 첨부해 주었는데 그 내용이 ‘세간에 병이 많다더니 이게 바로 상사병이구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9세의 어린나이에 이러한 명문을 구사하는 영민함과 또 덧붙이는 글의 재치가 아주 유쾌하여 세간에 회자되었다는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서예가이기도 한 초람 박세호 회장은 영상물 중 선생이 글을 쓰는 장면에서 벼루의 위치가 거꾸로 놓여져 있으니 수정이 필요할 것 같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 임고서원 영상관에서 포은선생의 일대기를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이 상영되고 있다.

고문서와 영상물 등이 있는 유물전시관을 돌며 포은 선생의 출생부터 효행, 관직생활, 학문의 경지와 만고의 충의지사로 추앙 받는 그의 삶, 그리고 포은 선생을 주향하는 임고서원의 축소모형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하였던 것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의(義)’였다. 스승인 김득배가 친원파였던 김용의 계략으로 억울한 역모죄를 쓰고 효수를 당하자 포은 선생이 자진하여 왕을 찾아가 김득배의 문생이라고 말하고 시체를 장사지낼 수 있도록 청했다는 내용이다.

역모죄인과 연고가 있으면 같이 역모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때였으니 아주 가깝던 사람들조차 비난하고 배척할 만한 상황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義)’를 실천한 포은 선생의 정신은 이후 목숨을 잃을 줄 알면서도 역성혁명을 거부한 ‘충절(忠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효(孝)와 의(義) 그리고 충절(忠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정신적 유물이 이 땅에서 태어난 영천인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영상관과 유물전시관을 둘러본 우리는 임고서원 정원에 설치된 선죽교 모형으로 자리를 옮겼다. 선죽교가 다리인데 앞뒤가 왜 막혀있는지 궁금해 하자 포은 선생의 유혈이 채 지워지지 않은 다리 위로 마소가 지나다니는 것을 본 후손들이 다리를 막았다는 유래를 들려주기도 했다.  

이어 임고서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시 서원이 사립학교로써 사림들의 학문적 근거지가 되었지만 서원의 가장 큰 의미는 누구를 배향하는가가 가장 핵심이라는 말이 이어졌다.

임고서원의 건립은 포은 정몽주 선생의 덕행과 충절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당연히 포은 정몽주 선생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장소가 되었다. 서원의 방향은 실제의 방향과 다른 절대적 방위를 갖는다고 한다. 모든 서원에서 사당이 북쪽이 되는 것이다. 임고서원 또한 사당의 방위를 북쪽으로 하니 동재(수성재)와 서재(함육재) 등 서원건물의 방향과 걸맞는 명칭이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아버지인 일성부원군의 묘는 임고서원에서 북쪽으로 차를 타고 10분, 내려서 5분 정도의 산길을 더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일성부원군은 포은 선생이 19세 되던 해인 공민왕 4년(1355년)에 돌아가셨다. 포은선생은 장남으로 19세의 어린 나이에 장례의 예를 다하고 현재의 위치인 양항리 서원골에 묘소를 마련한 후 3년 동안 여묘를 살았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1365년에 어머니 영천이씨 부인이 돌아가시자 아버지 일성부원군묘에 합폄(한 무덤에 함께 묻는 것)하고 또 다시 3년의 여묘를 극진히 살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 일성부원군 묘소가 포은 정몽주 선생의 또 다른 정신적 가치인 ‘효(孝)’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여묘살이를 합해 6년 동안 겨우 바람을 막아줄 초라한 초막을 짓고 부모의 무덤을 지키던 젊은 포은 선생의 슬픈 심연의 눈빛이 보이는 듯도 했다.

포은 선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3년이나 여묘살이를 하며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2년 동안 과거를 준비하여 1360년(공민왕 9년) 24살의 나이에 과거의 삼장에서 연이어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노비 춘월의 편지를 대필해주던 선생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어린 시절부터 영민하고 학문의 깊이가 남달랐을 것이지만 아버지를 잃은 장남으로서 3년의 시간동안 외롭고 슬픈 여묘살이를 한 후 고작 2년을 공부하고 장원을 하였다는 것이 대단하게 생각되어졌고 그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모의 묘소에서 3년씩 여묘살이를 한 포은 정몽주 선생의 효행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로부터 34년 후인 1389년(공양왕 원년)에 선생의 고향인 임고면 우항리에 ‘효자리(孝子里)'라고 새겨진 비를 세우게 됨으로서 다시 기려졌다. 선생의 효행을 전해들은 공양왕이 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방문한 포은정몽주유허비(圃隱鄭夢周遺墟碑, 효자리비)는 사각받침 위에 비몸을 올리고 중앙에 ‘효자리(孝子里)’라는 글귀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좌우에 세겨진 작은 글씨들은 돌의 마모가 심하여 쉽게 읽혀지지 않았다.
답사에서 돌아와 사전을 찾아보니 우측에는 ‘功臣贊成事大提學 鄭夢周 庚午封 益陽郡 忠義君’이라고 적혀있고 좌측에는 ‘洪武己巳三月 永川郡守鄭宥立碑’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나왔다. ‘공신찬성사대제학 정몽주 경오봉 익양군 충의군’을 기리는 비이며, 홍무 기사년 3월에 영천군수 정유가 세웠다는 내용이라는 해석이 덧붙여져 있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것을 조선 성종 18년(1487년)에 땅속에서 찾아내었고 비각을 세워 모시고 있다.  

▲ 복원예정인 포은선생 생가터 부지

이어 우리는 포은 선생이 태어난 우항리의 생가터로 향했다. 포은 선생의 생가터는 우항리 경로당 대문을 지나 다시 뒤편으로 난 작은 농로로 접어들어 잡풀을 헤치며 가야만 한다. 부지를 매입하고 생가터 복원 작업을 계획하고 있는 이곳에 서니 봄을 맞아 생명의 절정을 향해 가고 있는 푸르른 우항리의 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의 유적지 성역화 사업은 7년간 지속되던 임고서원 정비 사업을 마무리하면서 일단락된 듯 보이지만 생가터 복원, 부래산(임고서원이 최초로 세워졌던 곳)과 유허비의 정비사업, 충효문화수련원 건립 및 테마파크 조성 등 대규모의 성역화 사업이 여전히 진행형이다. 포은 선생이 나고 자란 우항리의 들판에 들어설 미래의 생가터를 상상하니 가슴이 불현듯 뿌듯하고 충만해지는 듯 했다. 

성역화 사업이 이어질 포은선생 유적지는 영천인의 가슴에 세겨진 ‘충(忠)ㆍ효(孝)ㆍ의(義)’의 정신적 가치를 전국적 아니 세계적인 가치로 확산되도록 해줄 것이다. 그 가치의 확산이 진행중인 임고서원 일대의 답사는 그 위대한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은 후손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지 고민해보는 중요한 계기의 발걸음이었다.

(포은 정몽주의 일대기와 임고서원의 역사는 별도로 언급하지 않았다. 인터넷 포털의  사전과 영천시청 홈페이지에 자세한 설명이 기재되어 있으니 참고하면 된다.)

영천뉴스24 최은하 기자 ycn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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