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역원의 중심 장수도찰방, 환벽정, 도남동 육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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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역원의 중심 장수도찰방, 환벽정, 도남동 육우당
  • 이원석 편집이사
  • 승인 2012.09.15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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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향토사연구회, 가을비 속 우산 쓰고 지역문화 체험

영천향토사연구회(회장 이상억) 9월 답사의 시작은 신녕면사무소였다. 옛 신녕현의 동헌 터였던 면사무소 마당에는 양쪽으로 32기의 선정비가 세워져있다. 현감 18기, 군수 4기, 찰방 4기, 관찰사 2기, 암행어사 1기, 이방 1기, 미상 2기이다.

▲ 신녕면사무소 선정비

조선시대 지방역원의 중심이었던 장수역 답사에 앞서 32기의 선정비 중에서도 특히 찰방비가 눈길을 끌었다.

▲ 신녕면사무소 선정비

면사무소 뒤 신녕초등학교 안으로 들어가 운동장 옆에 자리 잡은 환벽정으로 올라갔다.

벼슬아치여! 끝내 탐욕을 내지 못할지니 절개 굳은 대나무가 그대 집에 족하네. 줄기마다 곱게 서서 다투지 않고 죽순 또한 탁룡이라, 하늘에 오를 듯 여원 돌, 찬 냇물은 푸른 빛 에워싸고, 성근 기둥 빈 난간은 청풍이 씻어주네. 어여쁘다 인(人)과 경(境)이 다 새로운 곳, 옛 사람 이어받아 지은 글귀 서툴기도 하네.

금계 황준량이 황폐된 비벽정(斐碧亭)을 헐고 그 자리에 죽각(竹閣)을 세운 후 퇴계 이황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직접 찾아와 황준량으로 하여금 부정에 대한 경계를 하며 지어준 시이다. 6각의 정자 환벽정은 앞으로 가천천 맑은 물이 흐르는 겹처마 익공집 육모지붕이다.

▲ 찰방비

1516년(중종 11) 현감 이고가 북악 죽전 아래에 비벽정을 지어 자기 호로 삼았고 그의 아들 이세남은 회재 이언적과 이 정자에서 노닐면서 시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환벽정은 임진왜란으로 비벽정이 소실되자 1611년(광해군 3) 현감 송이창이 그 자리에 정자를 중건한 것이다.

▲ 환벽정

송이창의 아들 동춘당 송준길이 기문에 말하기를 “만력 신해(1611)에 아버님께서 화산현(지금의 신녕) 현감이 되셨는데, 내 나이 겨우 6, 7세로 따라왔던 것이다. 그 때 내가 사리에 밝지 못할 때지만 지금도 객관 서쪽 조그만 정자가 생각난다.

▲ 환벽정 시문

대나무 숲을 헤치고 바위 곁에 집을 세워 시냇물이 졸졸 뜰을 따라 흐르니 그윽하고 한적한데다가 깨끗하여 마치 인간세계가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이 이른바 환벽정인 것이다”하고 당시의 정자경치를 소개하고 있다.

▲ 환벽정 시문

비벽정 때는 회재 이언적이, 죽각 때는 퇴계 이황이, 환벽정 때는 동춘 송준길이 각각 시를 읊으며 경치를 감상한 소중한 이 정자는 1890년(고종 27) 민영후 현감과 1980년 오헌덕 군수가 중건해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 환벽정 시문

환벽정을 내려와 주막거리(말죽거리)를 오른쪽에 두고 찰방길을 지나 장수역(長水驛)의 우물로 사용되었던 관가(官家)샘을 방문했다. 영천시에서 주민들의 구전을 토대로 지난 2007년 복원했다.

▲ 현감 비벽정 벽진이공 기적비

장수역에는 큰말(大馬) 2필, 중말(中馬) 2필, 짐 싣는 말 10필과 역리(驛吏) 20인, 남자 종 170명, 여자 종 86명을 거느렸고, 남쪽으로는 영천 청통역, 서쪽으로는 하양 화양역, 북쪽으로는 의흥 우곡역 등 14개를 관할역으로 두었다.

▲ 관가샘

이 우물이 소재하는 매양리 일원은 종6품 찰방이 관할하면서 당시 별관(別館)으로 불렸으며, 또한 현재 면사무소가 있는 화성리 일원은 종6품 현감 관할이라 하여 본관(本館)이라 불렸다.

흰 구름은 푸른 산에 있는데
나그네는 고향을 떠나네
해 저물어 눈과 서리 찬데
어찌하여 먼 길을 가는가
역 정자에서 밤중에 일어나니
닭 우는 소리 크게 들리네
내일 아침 앞길 떠나면
유연한 회포 금치 못하리
친구들은 이미 날로 멀어지니
머리를 돌리면 눈물만 흐르네

포은 정몽주 선생이 장수역을 노래한 시로 조선통신사 부사였던 김세렴의 ‘해사록’에도 영천 신녕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 현재의 신녕)에서 조선통신사 일행에 필요한 마필을 조달했다는 문헌의 기록이 남아있다.

예속역으로는 영천 청통(淸通)역, 청경(淸景)역, 경주 아화(阿火)역, 모량(毛良)역, 사리(沙里)역, 구어(仇於)역, 의곡(義谷)역, 인비(仁庇)역, 경(鏡)역, 조(朝)역, 하양 화양(華陽)역, 자인 산역(山驛)역, 울산 부평(富平)역, 의흥 우곡(牛谷)역 등이다.

주물로 만들어진 난간 한쪽이 파손되어 있다. 관가샘 바로 앞집에 사는 김우윤(53)씨에게 누가 이렇게 했느냐고 물으니 누군가가 차로 파손하고 달아났다고 했다.

김씨는 “명색이 문화재라면서 누가 이렇게 허술하게 복원하였는지 한심하다. 지붕이라도 덮었으면 그나마 좀 나았을 것”이라고 불평을 했다.

지나가던 주민들이 가세했다. “일 년에 한번 청소하는 사람도 없어서 지저분하다. 복원을 했으면 그에 따른 관리가 수반되었으면 한다.”며 아쉬워했다.

▲ 장수역 추정지

이어 완귀정을 거쳐 지난 7일 경상북도문화재로 지정된 영천시 도남동 37번지 소재 육우당(1700년경 건립)을 방문했다.   

이번에 지정한 영천 육우당 고택은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성재(省齋) 안후정(1659~1702)이 거처하던 당(堂)이며, 그의 장남인 육우당(六友堂) 안여택을 비롯한 6형제가 학업에 정진하던 곳으로 지정가치가 인정됐다.

▲ 찰방길

광주안씨 종택인 육우당은 현재 사랑채만 남아있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1칸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인데 육우당(六友堂)이란 ‘5형제와 우애를 돈독히 하라’는 뜻으로 부친인 안후정(安后靜)이 붙여준 당호(堂號)이다.

▲ 주막거리(말죽거리)

평면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온돌방 1칸을, 우측에는 온돌방 2칸을 각각 연접시켰으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다. 가구는 오량가의 이익공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 육우당

안후정의 자는 군경(君敬), 호는 성재(省齋)이며,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지역의 문인이다.

광주 안씨로 고조는 안광소(安光韶)이며, 증조는 감찰(監察) 안전(安琠), 조부는 증(贈) 판결사(判決事) 안명한(安鳴漢)이다. 아버지는 안세영(安世英)이며, 어머니는 창녕 성씨(昌寧 成氏)로 성길의 딸이다.

안후정은 1659년 현종(顯宗) 기해년(己亥年) 도동리(道東里)(현 영천시 도남리)에서 태어났다. 안후정의 부인은 의인(宜人) 오천 정씨(烏川 鄭氏)로 진사(進士) 정사현(鄭思賢)의 딸이며, 슬하에 6남을 두니 안여택(安汝宅)과 안여이(安汝履), 안여행(安汝行), 안여인(安汝仁), 안여기(安汝器), 안여국(安汝國)이다.

▲ 육우당 우물과 괴목

몸소 밭 갈고 힘써 배워 1691년 숙종(肅宗) 신미년(辛未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99년 기묘년(己卯年)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1700년 경인년(庚寅年)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보임되었다가 학록(學錄)으로 전보되었다. 1702년 임오년(壬午年)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가을에 학정(學正)으로 승급되었으나 나아가지 못했다. 안후정은 1702년 임오년(壬午年) 10월 18일 4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완귀정

저서로 목판본인 4권 2책의 『성재일고(省齋逸稿)』를 남겼고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청호제산(菁湖堤山)에 있으며, 오천(烏川) 정중기(鄭重器)의 갈문(碣文)이 있다.

▲ 도남동 삼괴당(三槐堂)

이날 답사의 마지막 일정은 김덕주 부회장(목탁명인)이 운영하는 본촌동 참선공예방이었다. 마침 사단법인 대한명인들의 모임이 있어서 먼저 온 안동간고등어 이동산 명인, 잉어찜 김정순 명인, 헛제사밥 방옥선 명인과 전통문화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 대한명인들과 함께

이날 답사에 처음 참석한 정명옥 신입회원은 “적당하게 내리는 가을비속에 한층 운치 있는 시간이 되었다”면서 “앞으로 차차 우리지역의 문화와 정신을 알아가면서 많은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영천뉴스24 이원석 편집이사 ycn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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